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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끝자락에 ‘R석 위에 P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취재 보도한 바 있습니다. 최근 일부 대형 공연에서 나타나고 있는 좌석등급 늘리기와 가격 거품을 취재한 기사였죠. P석이 도대체 뭘까? 이 기사를 처음 접하고는 대부분 이렇게 궁금해 하셨을 거예요. 저도 지난해 한 공연의 보도자료 끄트머리에서 ‘P이라는 좌석등급을 처음 발견하고는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게 이번 취재의 시작이었습니다. 공연 취재를 꽤 오랫동안 해왔는데 ‘P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거든요.

 

P석이 등장한 공연은 11월말에 예술의전당에서 한 민간오페라단이 올렸던 오페라였습니다. P석이 가장 상위등급이었는데, 34만원이나 하더군요. 프리미엄 석인가? 프레스티지 석인가? 알아보니 프레지던트 석이라 하더군요. 보통 R석이 로열 석으로 가장 좋은 자리로 여겨지는데, 이 공연에는 P석 아래로도 VVIP(28만원), VIP(24만원)이 있었습니다. 이 아래 있는 R석은 15만원으로 책정돼 있더군요.  

 

이 공연이 끝난 뒤에 또 P석이 책정된 공연이 열렸습니다. 또 다른 민간오페라단이 공연한 오페라였습니다. 이 공연은 P석이 35만원, VIP석이 25만원, R석이 22만원으로 책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공연예매 사이트에서는 P석을 구매할 수 없게 돼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P석이 매진돼서 그런 건가? 이렇게 비싼 표가 벌써 매진이라니?

 

이 오페라단을 상대로 취재한 결과 P석은 일반에 파는 좌석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P석을 책정했던 오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P석은 초대권으로 나가는 좌석이었죠. 그럼 P석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공연예매사이트에서 좌석 배치가 어떻게 되는지 한 눈에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내가 사고 싶은 자리를 누르면 그 자리의 해당 정보가 뜨는 식이었고, 이미 팔린 자리는 뜨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대략 파악해 봐도 P석과 VIP석의 비중이 굉장히 높아 보였습니다.

 

그럼 이 공연에서 표를 제 돈 내고 사서 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수소문해서 이 오페라의 R석 표를 사서 봤다는 관객들과 연락이 되었습니다. 이 관객은 ‘R석이 로열석인 줄 알고 사서 갔는데, 가보니 레귤러더라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R석이 좋은 자리인 줄 알고 가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서 당황스럽고 배신감 느낀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제가 심각해 보였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이 두 공연의 등급별 좌석 수와 좌석 배치도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R석은 레귤러 석이었습니다. 좌석배치에서도 R석은 P/VVIP, VIP석에 밀려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R석이 이 모양인데, S석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원래 스페셜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S석은 완전히 찬밥이 돼 있었습니다.

 

이번에 취재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1990년대 초반까지는 R석도 없었고, S석이 가장 좋은 등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학교 다닐 때는 R석이라는 걸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다가 한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을 계기로 R석이 생겼다고 합니다. VIP석은 2000년대 들어서 생겼는데, 최근 VVIP, P석까지 등장했으니 그야말로 옥상옥입니다. R석이 레귤러 석이 됐으니 S석은 이제 사이드 석이라고 해야 할까요? ‘S석이 사이드석이라는 얘기는 공연을 좋아하는 회사 후배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그럴 듯하지요?

 

*A 오페라 등급별 가격과 좌석 수(P석 먼저 등장)

P

34만원

168

VVIP

28만원

153

VIP

24만원

269

R

15만원

353

S

10만원

376

A

8만원

348

B

5만원

242

시야장애석.휠체어석 등

 

374

 

*B 오페라 등급별 가격과 좌석 수

P

35만원

232

VIP

25만원

215

R

22만원

481

S

12만원

330

A

6만원

139

B

3만원

276

C

15천원

58

시야장애석.휠체어석 등

 

374

 

오페라극장 1층 좌석배치도(B오페라의 경우)

저는 취재하다가, 예술의전당이 P석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대관단체들에 공문을 보내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관 공연의 경우 예술의전당은 그냥 공연장을 빌려주는 입장이고, 제작은 주최 단체가 합니다. 하지만 관객에게는 예술의전당이 직접 제작하는 공연이든 다른 단체가 대관해서 하는 공연이든 똑같이 예술의전당 공연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예술의전당이 P석까지 등장한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다음은 예술의전당이 보낸 공문 내용의 일부입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본격적인 오페라 공연 시즌을 앞두고 제작비 상승, 협찬유치 과다경쟁 등으로 입장권 가격상승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특히 VVIP좌석, 프레지던트석 등 좌석명칭에도 거품이 끼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수준 높은 공연 제작을 위해 애쓰시는 귀 오페라단의 노고와 홍보 마케팅을 위한 필요성이 어느 정도 인정 되기는  하나, 일반 관객의 상식을 벗어나는 좌석등급 및 가격 책정은 관객들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공연장 질서를 어지럽히며, 오페라 저변확대를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의 예술의전당의 판단입니다.”

 

이 공문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P석이나 VVIP석 같은 최상등급 좌석은 협찬 문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오페라나 오케스트라 같은 대형 공연들은 제작비가 많이 들어 정부나 기업 후원 없이 공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후원을 받는 공공 예술단체가 아니라면 민간 단체들은 대개 기업의 후원을 유치해 공연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후원 기업들은 후원의 반대급부로 표를 가져갑니다. 자사의 고객들을 초청할 용도로 사용하려는 것이죠.

 

문제는 후원 기업들이 가져가는 표가 많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후원 금액의 절반 이상을 표로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합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왕 초대권 받아서 고객들에게 뿌리는데 생색 낼 수 있도록비싼 가격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연 주최측에서는 어차피 초대권은 팔지 못하는 표이니 액면가를 비싸게 책정해 기업에 넘기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이게 맞아떨어져 초대권의 액면가는 자꾸 올라가고, 좌석등급도 옥상옥으로 자꾸만 생겨납니다.

 

최상등급 좌석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면 다른 등급도 연쇄적으로 따라 오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술의전당에서도 가격 거품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초대권이 많아질수록 일반 관객들은 좌석 선택권을 제한 받게 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초대권이 많이 뿌려진 공연일수록 객석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공연계 통설이 있습니다. 초대권을 받고도 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중간 객석 몇 줄이 통째로 비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문가들은 후원 문화에 대해 지적하더군요. 한국예술종합학교 홍승찬 교수는 후원 기업에 다량의 초대권을 제공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문화라고 했습니다. 해외에서는 기업들이 순수하게 예술 창작과 향유의 기회를 넓히기 위한 의미의 후원을 하고 있답니다. 후원 기업이라 해도 후원금 내는 것과는 별도로 표가 필요하면 구입해서 쓴다고 합니다. 프레스를 제외하고는 초대권 자체를 거의 발행하지 않는다고 하고요.

 

공연계에서도 자체적으로 관객을 늘려 저변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기업 후원 유치하고 초대권 돌려 좌석 채우고 공연 올리는 데에만 급급해온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연의 질이 저하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이러면 현상 유지는 될지 몰라도 비싼 티켓 값 때문에 열혈 애호가를 제외한 일반인들은 막연하게 공연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표를 사는 애호가들도 좌석 선택권을 제한 받는 데다 돈 낸 만큼의 가치를 못하는 공연의 수준에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요.

 

또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얘기는, 무조건 비싼 공연이 좋은 공연이라는 막연한 인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비싼 게 좋다는 막연한 인식을 이용한 명품 마케팅때문에 고가의 티켓이 양산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연기획자로부터 공연 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했더니 관객들이 후진 공연인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 걱정이라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격이 높지 않으면 초대권을 받고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고, 공연 보러 오지도 않더라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기업의 후원에만 지나치게 의지해 유지되는 공연시장은 결코 건강한 시장이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제 돈 내고 표 사서 보는 관객들을 늘려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지난해 12월 정기연주회부터 예전에 있었던 VIP석을 없애고, 초대권을 최소화하고, 좌석 등급을 A, B 둘로만 나눠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VIP석이 있는 게 마치 정상적인 상황인 것처럼 인식하고, VIP석이 아니면 뭔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는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는 단체라서 이런 시도를 하기가 더 쉬웠을 터이지만, 신선한 시도로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저는 사실 기업의 후원 관행과 이에 수반되는 초대권 문화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문제 의식을 느껴왔습니다. 하지만 공연계 인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를 꺼립니다. 문제가 있는 걸 알지만 당장 공연을 올리려면 후원 유치 경쟁에 나서야 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또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자칫하면 후원 기업에 대한 비난으로 여겨질지 모른다는 점도 있습니다. 이번에 전화 인터뷰한 공연기획사 관계자가 익명에 음성 변조를 원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일부 대형 공연이긴 하지만, ‘P이라는 족보에도 없는이상한 좌석등급까지 등장하고, 예술의전당이 공식적으로 대관단체들에게 자제를 요청했다는 것은 팩트입니다. 팩트를 취재한 것이 후원 관행과 초대권 문화의 문제점까지 같이 보도할 계기를 마련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부 기사로서는 이례적으로 8뉴스에 두 꼭지가 잡혀 저와 권란 기자가 함께 보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모닝와이드와 라디오뉴스에서도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그만큼 일반인들의 관심도 큰 사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기사로 공연 시장이 당장 크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예술의전당 대관단체들이 P석이나 VVIP석 같은 비정상적인좌석등급을 만들어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은 없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제 기사가 공연시장 종사자들과 후원기업들에게 한번쯤 현재의 관행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SBS 뉴스 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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