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장실 CCTV, 나 살려고 달았어요.. 진익철 서초구청장은 지금 녹화중

2011. 6. 1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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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돈 봉투는 '원래 알던 사람들'이 가져온다.

②다들 "그냥 격려차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③그런 사람들 알아보면 반드시 뭔가 민원거리가 있다.

④그런 돈은 안 받아도 꺼림칙하다. 궁지에 몰리면 돈을 안 주고도 줬다고 할 사람들이다.

진익철(59) 서울 서초구청장은 '돈 봉투' 들고 구청장실 찾아오는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네 가지로 요약했다. 지난해 7월 취임 이후 그런 사람을 10여명 겪었는데, 대부분 ①∼③번에 해당하더라는 것이다. ④번은 행정고시를 거쳐 서울시에서 오래 공직생활을 하며 체득했다. 서울시장 수행비서관, 비서실장, 총무과장, 공보관 등 시장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주로 하다 보니 그렇게 당하는 선후배를 여럿 목격했다고 한다.

15일 찾아간 서초구청장실은 작은 집무실과 조금 더 넓은 접견실로 나뉘어 있었다. 14평 접견실에 8명 앉는 대형 원탁이 있어서 손님이 찾아오면 여기서 만난다. 이 방 천장에 CC(폐쇄회로)TV가 달려 있다. 방 전체가 조망되는 한쪽 구석에, 원탁의 구청장 자리를 겨냥한 각도. 취임 석 달째인 지난해 10월 17일 진 구청장 지시로 설치됐다.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이 최근 "돈 봉투 들고 오는 사람들 때문에 CCTV를 설치했다"고 밝혔는데, 서초구청장실 CCTV는 이미 8개월째 '녹화' 중이다.

-CCTV는 왜 달았나.

"내가 살려고 달았다. 공직자로 살아남기 위해서. 저게 필요하다는 건 오랜 공직생활 경험에서 내린 결론이다. 대략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어떤 목적인가.

"첫째는 나 스스로를 감시하기 위한 거다. 30년 공직생활 했고, 연금도 있고, 국가에서 봉급도 받는다. 부족한 게 없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다. 돈 봉투 들이밀면 당연히 거절하겠지만, 그 짧은 순간에 거절의 용기가 부족해서 실수할 수 있다. CCTV는 나에게 용기를 보충해주는 장치다. 그래서 설치했을 때 홍보도 안 했다. 나를 위한 거니까."

-두 번째는.

"취임하니까 사람들이 이 방에 와서 진짜로 봉투를 꺼내려 하더라. 주로 전부터 알던 사람들이 그런다. 그럼 나는 안 받겠다 하고, 그 사람은 주려 하고, 그러다 보면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다. 받아라, 싫다, 실랑이가 벌어진다. 밖에서 결재 기다리는 직원들, 다른 손님들이 들으면 참 볼썽사납다. 그런 상황 막으려고 저거 달았다."

-그럴 때 CCTV를 어떻게 활용하나.

"손님이 손을 품 안에 가져가면, 뭔가 꺼내려는 것 같으면 나는 '천장 좀 보세요' 하거나 말없이 손가락으로 CCTV를 가리킨다. 그럼 다 알아듣고 도로 넣는다. 무척 편리하다."

-돈 봉투 가져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어떤 사람이 가져오나.

"돈 봉투 가져온 사람은 (뭔가 꺼낼 듯) 폼 잡는 거 보면 딱 안다. 다들 처음엔 아무 조건이 없다고 한다. 고생하시니까 드린다, 격려 차원이다, 하지. 나중에 알아보면 뒤에 전부 민원이 있다. '고생하시니까' 이 말에 걸리면 딱 코가 꿰이는 거다. 올 들어 CCTV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는 가져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오더니 'CCTV 좋지 않다. 너무 물이 맑아도 고기가 못 살지 않냐. 철거하는 게 어떠냐' 그러더라. 내가 저걸 왜 철거하겠냐. 나도 살아야지."

진 구청장 접견실에는 하루 4, 5명씩 외부 손님이 찾아온다. 업무 지장을 최소화하려고 비서실에서 조절한 숫자가 그렇다. CCTV에는 동작 감지 센서가 있다. 사람이 없을 땐 쉬다가 방 안에서 바람에 꽃잎이 흔들리는 미세한 움직임만 있어도 녹화가 시작된다.

누군가 방에 들어서면 촬영되는 화면은 접견실과 붙어 있는 비서실로 전송된다. 이반석 비서실장 책상에 CCTV용 서버와 모니터가 있다. 이 실장은 "구청장님이 손님과 만나는 모든 상황을 모니터로 실시간 본다. 구청장님이 업무 중 피곤해서 잠시 조는 모습을 볼 때도 있다"고 말했다.

CCTV 화면이 저장되는 하드디스크 용량은 1테라바이트. 6개월 만에 디스크가 꽉 차서 새 걸로 교체했다. 지금까지 저장된 화면은 지우지 않고 모두 보관 중이다. 이 CCTV는 '녹화'만 된다. CCTV로 '녹음'까지 하는 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다.(당초 녹음 기능도 갖춘 CCTV를 설치했다고 알려진 성남시청도 "잘못 알려졌다. 녹화만 된다"고 밝혔다)

-CCTV 설치를 '쇼'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양심이 중요한 거지 CCTV가 무슨 소용이냐 하는데 정말 모르는 소리다. 뇌물수수 의혹이 제기됐는데 구청장이 정말 안 받았다면, 그럴 때 양심이 어떻게 결백을 증명해줄 수 있나? 양심을 보여주려고 자살하는 사람이 왜 나오겠나?"

CCTV를 설치한 세 번째 목적,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것은 '증거 확보'용이다. 만에 하나 뇌물 의혹에 연루될 경우 반박할 증거를 CCTV 화면이 제시해 줄 수 있다는 것. 진 구청장은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서울의 현직 구청장이다. 여러 번 당선된 분인데, 구청장 하면서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다. 누군가 검찰에서 그분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했다. 아주 구체적이었다. 구청장실에 가서, 어느 자리에 구청장이 앉고 자기는 어느 자리에 앉아서, 얼마 담은 봉투를 건넸다고 했다. 그 구청장이 무죄로 풀려났다. 어떻게 풀려났는지 아나? 사진 덕이었다. 그 사람이 돈 줬다고 진술한 그날, 마침 구청장이 누군가에게 임명장을 줬다. 그 임명장 수여식 사진에 나온 구청장실 책상과 의자 배치가 돈 줬다는 사람의 진술과 달랐다. 그 사진을 당시 부구청장이 찾아서 증거로 제시하니까 무죄가 됐던 거다. 양심? 양심이 이런 증거가 될 수 있나."

서초구에도 참고할 선례가 있다고 말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됐다. 503명이 사망했다. 삼풍백화점 설계 승인 과정에서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전임 구청장들이 검찰 수사를 받았다. 돈을 줬다는 사람은 몇월 몇일 몇시에 구청장실에서 어떤 자리에 앉아 있다가 1000만원 줬다고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안 받았다는 사람은 입증할 자료가 전혀 없었다."

서울 태평로1가 서울파이낸스센터. 원래 누군가 호텔을 짓겠다고 덤벼들던 곳이다. 개발 과정에서 서울시 고위 공무원 예닐곱 명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그때 유일하게 풀려난 사람이 있다. 나중에 서울시 고위직까지 했다. 어떻게 풀려났냐고? 그 사람은 개발업자들이 준 돈을 곧바로 우편으로 돌려보냈다. 만나서 돌려준 게 아니라 우편으로. 돈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남은 거다. 나는 공직생활 30년 하면서 이런 상황 많이 봤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가급적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가능하면 다른 직원을 배석시킨다. 그리고 CCTV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

그러니까 구청장실의 CCTV는 ①구청장이 스스로를 감시하는 장치이자 ②돈 봉투 유혹을 차단하는 수단이면서 ③만일의 경우 뇌물 받은 적 없다고 반박할 증거인 셈이다.

-왜 아직도 돈 봉투가 등장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인허가 권한이 너무 집중돼 있다고 했던데, 난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에는 대부분 실무진에 위임돼 있다."

-구청장실에 CCTV를 달아야 하는 현실, 좀 서글프지 않나.

"하는 수 없다. 지금 뇌물 사건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면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저거다. CCTV."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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