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르포] "카페마다 사람들 북적..'부도 국가' 맞나 싶다"

입력 2015. 7. 4. 17:40 수정 2015. 7. 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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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현장에서 본 그리스 경제 위기

5일 그리스와 유로존의 운명을 가를 그리스 국민투표를 앞두고 그리스 현지에 머물고 있는 유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학과 교수가 현재의 상황과 그리스 정부가 왜 채권단의 요구를 거부하고 국민투표를 선택했는지를 보여주는 글을 보내왔다. 그리스 아테네 대학에서 유학한 유 교수는 <그리스-신화의 땅 인간의 나라> <그리스 신화> <그리스 고대로의 초대> 등의 책을 펴낸 국내 최고의 그리스 전문가다. 유교수는 이번 국민투표가 그리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역사적 사건이라며, 신자유주의에 의해 빚어진 심각한 사태에 대한 그리스 민중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자,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강조한다

2015년 6월 27일, 그리스 시리자 정부와 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국제 통화 기금(IMF), 세계은행, 유럽 중앙은행의 채권자 대표들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 두 가지 점에서 양측은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첫째는 간접세인 부가가치세를 올리라는 것이고, 둘째는 은퇴자들의 연금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41세의 젊은 수상 치프라스가 이끄는 시리자 정당의 그리스 정부는 채권단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고는 7월 5일 일요일(그리스에서는 모든 선거가 일요일에 치러진다.)에 국민 투표를 치르겠다고 결정했다. 오랫동안 예상되어 왔던 그리스 경제 위기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를 여행하고 있던 나는 그런 조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부도가 난 나라라고 보일 만한 아무런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휴양지마다 거리는 사람의 물결로 넘쳐났고 식당과 카페에 한가로이 앉아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그리스인들 표정에서는 위기의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알파'나 '안테나', '메가', '스카이', '스타'와 같은 민간 방송들만이 하루종일 경제 위기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과 토론을 방송하는 데에서 경제 위기가 있음을 느낄 정도였다.

ATM마다 장사진·사재기로 생필품 바닥났다고?

그러나 6월 30일이 되자 갑자기 내 휴대 전화가 바빠졌다. 가장 먼저 그리스 경제 위기를 일깨워 준 것은 "[외무부] 그리스 경제 위기로 당분간 은행 영업이 중단되고 ATM 인출이 제한되므로 필요 현금을 미리 보유하고 보관에 유의 바랍니다. 소매치기 및 절도에도 각별히 유의 바랍니다."라고 쓰인 우리나라 외무부의 문자 메시지였다. 그제야 나는 길거리에 놓여 있는 현금 자동 인출기(ATM) 앞에 혹시 돈을 찾으려고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있나 살펴 보았다. 그러나 내가 여행하던 곳은 휴양지여서 그런지 줄을 지어 서있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스 경제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우려는 오히려 한국으로부터 왔다. 연이어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하는 전화와 문자가 계속되었다. 현장에 있는 내가 멀쩡한데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끝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과장을 하며 불안해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와이파이가 되는 가까운 카페로 가서 한국 뉴스를 읽어 보았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한국의 언론들은 그리스 경제 위기에 대해 거의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치프로스 그리스 수상은 국민 투표가 끝난 다음 날인 7월 6일까지 모든 그리스 은행은 휴업을 하도록 조치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시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예금 인출을 하는 혼란을 미리 막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그리고 현금 인출 카드를 가진 사람들이 ATM에서 일인당 하루에 60유로만을 찾을 수 있게 했다. 다만 연금 생활자들은 120유로까지 허용했다. 일부 한국 언론들은 각 ATM마다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치고 있어 심한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닌 왜곡 보도다. 지금까지 내가 본 바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시내 중심가의 ATM에도 많아야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조금 야외로 가면 거의 줄을 볼 수 없다. 다만 연금 생활자들이 연금을 찾는 그리스 국립 은행의 ATM에는 제법 줄이 길어 한 시간 이상씩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오늘(7월 2일)은 제법 줄이 길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 금요일임을 생각하면 주말 동안 은행 직원들이 ATM에 돈을 채워 넣지 않을 거라는 불안 때문에 줄이 길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카페마다 넘쳐나는 사람들, 부도 국가 맞나"

또 ATM에 돈이 없어 예금 인출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바로 내가 보는 눈 앞에서 600유로를 뽑는 것을 보았다. (외국인에게는 현금 인출에 제한이 없다.) 그러니 외국 관광객이 ATM에서 돈을 뽑을 수 없어 낭패에 빠졌다는 기사는 그리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물론 유학하고 있는 내 제자 중 한 명은 한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지만 바로 자기 앞에서 현금이 떨어져 허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오기도 했지만 이런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한국에 잘못 알려진 또 다른 사실은 심한 사재기가 일어나 슈퍼와 시장에 식료품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이 바닥났다는 이야기다. 사재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또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들어가 본 슈퍼마다 물건이 가득했고 필요 이상의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사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또 카드를 호텔에서도 받지 않아 관광객들의 어려움이 많다는 보도 역시 100%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카드보다는 현금을 훨씬 선호하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특히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그리스 섬에서는 예전부터 카드를 잘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리스를 잘 아는 유럽 외국인들은 그리스를 여행할 때는 현금을 찾아 가지고 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작은 식당이나 가게에서는 카드로 결제하는 것을 꺼리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아테네나 다른 대도시에서는 카드 결제가 잘된다. 나는 이번 여행 동안 거의 카드로 결제했다.

돈이 없어 외식을 못해 식당과 카페가 텅 비었다는 보도야말로 가장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왜곡이다. 도착한 나의 친구 손호철 교수는 7월 2일 그리스 북부의 수도 테살로니키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모든 것은 정상임. 카페마다 사람이 넘쳐나고 이게 부도국가인가 싶음."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어서 한 사람만이 달랑 서서 현금 인출을 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곁들였다. 내가 본 그리스도 그렇다. 가는 곳곳마다 식당과 카페는 여는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도 있다. 그리스 정부는 경제 위기가 닥친 이래로 아테네 페스티벌 개막 공연에 실업자들에게 무료 관람을 제공하고 있다. 그들에게 문화생활 향유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므로 경제적 이유로 그들에게 이 권한을 빼앗으면 안 된다고 믿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다. 그리고 그리스 정부는 국민 선거가 마무리되는 7월 6일까지 모든 대중교통 수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어려움에 처한 국민에 대한 조그맣지만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조치들이다.

GDP 25% 감소·실업률 급상승…그리스 부채, GDP의 133% →162%→ 175% 증가

그리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스의 경제 위기는 누구의 잘못이고 또 누가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까? 과연 게으른 그리스인들이 주제를 모르고 과도한 소비를 하고 복지에 돈을 많이 써서 일어난 일인가? 또 빚을 진 채무자에게만 모든 부담을 지우는 게 옳은 일일까? 이자를 받아 이익을 챙기기 위해 채무자의 능력 이상으로 돈을 빌려준 채권자에게는 조금의 잘못도 없는 것일까?

우선 그리스인들은 게으르지 않다. 그리스는 OECD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 다음으로 노동 시간이 긴 나라고 복지도 다른 유럽 연합의 나라보다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다. 흔히 하는 지적하는 대로 복지 때문이라면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이나 독일이 더 먼저 경제 위기를 맞았어야 마땅하다.

지난 5년 동안 그리스 경제는 내리막길을 계속해 왔다. 국민 총생산은 자그마치 25%나 줄어들었고 실업률은 가파르게 상승했으며 혹독한 긴축 재정을 해왔음에도 빚은 눈덩이처럼 커져가기만 했다. 경제 위기가 시작된 2010년에는 빚이 국민총생산의 133%였지만 2011년에는 162%로, 현재에는 175%로 증가일로에 있다. 이대로 간다면 그리스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영원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채권단의 가혹한 긴축안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다. 이제는 그들 스스로 문제를 풀 단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긴축을 해도 늘어나기만 하는 빚덩이 앞에서 그리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이런 점을 잘 아는 그리스 좌파 정권은 채무단의 추가 긴축안을 거부하고 국민 투표를 선언했다. 그리스 정부는 실현 불가능한 빚에 대한 조건을 재조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스의 채무를 유럽 연합에서 가장 가난하고 약자인 그리스 시민들과 그 자식들, 손자들로 대를 이어 갚도록 강요하는 채권단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아테네 신다그마 광장에 울린 'Oxi'

그리스 정부는 이번 국민 투표가 유로 통화권이나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이번 국민투표는 그리스를 영원히 빚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는 채권단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것임을 강조했다. 만일 투표 결과가 채권단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올 경우에 그는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그리스는 바로 유럽이고 그리스가 없는 유럽은 의미가 없다며 그리스는 민주적인 이상이 실현되는, 그래서 지킬 가치가 있는 유럽을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 국민 투표에서 그리스인들이 부당하면서도 혹독한 채권자들의 요구에 대해 분명히 '아니오'라는 대답을 함으로써 "그리스가 국제 금융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인류가 전세계적으로 맞고 있는 위기에서 구해 줄 해결의 실마리를 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연금을 깎으라는 채권자들에 대항하여 국민의 연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그의 의지 표명은 비잔티온 제국의 말기의 그리스 철학자 요르기오스 예미토스 플레톤(Giorgos Gemistos Plethon 1355 - 1452)의 각오를 기억하게 만든다.

"개인이나 민족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을 잃도록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많은 나라나 민족들이 부활했다. 위험이 둘러싸고 있을 때, 망설이는 태도는 절대 허용될 수 없다."

이 번 여행길에서 특별하게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곳곳에서 눈에 띄는 '몰론 라베 (네가 와서 가져 가라)'라는 구절이다. 이 말은 페르시아 전쟁 때 무기를 내려 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는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제안을 받고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한 말이다. 즉 자기를 죽이고 자신의 무기를 가져가라는 뜻이다. 스파르타인들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다"고 말하곤 했다. '몰론 라베'라는 말에서 이번만큼은 죽으면 죽었지 결코 그냥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리스인들의 단호한 결의가 느껴진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

7월3일 아테네 신다그마 광장에 엄청난 인파가 모여 Oxi(오히, No)를 외쳐댔다. 사상 최대 인파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모여 정부를 지지하고 채권단의 요구에 반대한 자리였다. 이 집회는 이번 국민투표가 채권자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닐지를 묻는 것임을 분명히 한 행사였다.

그리스 국민 투표가 있는 7월 5일 그 결과가 채권단의 요구에 대한 수용이든 거부든 지난 30년 동안 유지되어 온 신자유주의 체제가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스에게만 역사적인 날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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