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싹싹, 침묵의 살인자는 입을 닫았다

2015. 5. 3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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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르포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영국 방문

지난 21일 오후 영국 런던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유족들이 영국 시민단체 ‘런던 해저즈’ 관계자들과 함께 가습기 살균제 ‘옥시싹싹’을 만들어 판 영국 기업 레킷벤키저의 책임을 촉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로버트 무어 제공'>▶ ‘옥시싹싹’을 기억하시나요? 2000년대까지 슈퍼마켓에서 흔히 팔던 가습기 살균제였습니다. 2011년 원인불명의 폐질환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다른 제품과 함께 판매 금지됐지만, 옥시싹싹은 지금까지 100명의 사망을 부를 정도로 피해 규모가 컸습니다. 다국적기업 ‘레킷벤키저’가 한국 법인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를 통해 이 제품을 생산하는데, 이 사건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고 유가족들은 비판합니다.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영국 런던 본사에 찾아갔습니다.

“지금 말장난하는 겁니까? 내가 이따위 하나 마나 한 말이 쓰여 있는 종이 한 장 달랑 받으러 이역만리 힘들게 온 줄 아세요? 영국 법원에 제소해서 당신들의 책임을 반드시 묻겠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과 환경단체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영국 런던 항의방문 활동 마지막날인 지난 5월22일 아침이었다. 런던 외곽의 슬라우에 위치한 레킷벤키저 본사에서 회사 쪽 임원과의 세 번째 만남에서 부인을 잃은 유족 맹창수(49)씨가 회사가 내놓은 문서를 북북 찢으며 말했다.

맹씨는 처음엔 레킷벤키저 쪽이 대동한 한국어 통역사를 통해 영어로 작성된 문서의 내용을 끝까지 들었다. 한국에서 문제가 발생한 데 대해 심히 유감이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공감하지만 소송 중에 있어 구체적인 언급을 하기 어렵다는 내용을 통역사가 읽어내려갔다. 매번 만날 때마다 레킷벤키저가 반복해온 이야기였다.

가습기 살균제 제품별 사망자

피해자모임의 강찬호(45) 대표가 애초 제안한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안’에 대한 레킷벤키저의 입장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고, 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반복하자 맹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린 것이다. 맹씨 가족이 썼던 살균제는 ‘옥시싹싹’이었다. 옥시싹싹으로만 100명의 사망자와 303명의 생존 환자가 발생했다. 2011년 드러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의 최대 가해 기업이다. 그러나 맹씨는 레킷벤키저 역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간다니 그제야 나온 한국 법인 간부

8월31일이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알려진 지 4년이 된다. 피해자와 시민단체는 200일 넘는 광화문 일인시위, 망자의 유품 전시, 피해 사진전을 비롯해 국회를 통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왔다. 정부는 애초부터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었으며 제조회사는 시간만 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 4월 정부의 2차 조사 발표 때에는 피해 규모가 530명으로 늘었고, 이 가운데 사망자는 142명에 이르렀다. 한때 겨울철에 무려 800만명이나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니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가 부지기수다.

환경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분석해보니 영국 회사 제품인 ‘옥시싹싹’ 피해자가 사망 100명, 생존 환자 303명으로 전체의 76%나 됐다. 덴마크에서 원료를 수입하여 만든 ‘세퓨’라는 제품은 사망 14명, 환자 27명이었다. 유럽연합 소속 기업의 제품 피해자가 무려 444명으로 전체의 84%를 차지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피해자 유족들은 옥시싹싹 본사가 있는 런던 항의방문단을 꾸렸다. 국내에도 외신기자들이 많이 상주해 있지만 한번도 이들이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한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적이 없었기에 외신에 보도된 바도 없었다.

레킷벤키저의 한국 법인인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는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영국 본사를 항의방문한다고 하자, 출발 며칠 전에야 4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인 시이오(CEO)가 피해자 대표들과 만나자고 했다. 그는 유족들에게 “이 문제와 관련된 모든 권한이 영국 본사가 아닌 한국 지사에 있다. 앞으로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심 어린 사과와 책임 표명보다는 피해자들의 국제활동으로 문제가 커질 것을 우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들은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경남 밀양에 사는 안은주(47)씨는 코트를 휘젓던 배구선수였다. 키가 보통 여성보다 한 뼘 이상 큰 그는 옥시싹싹을 사용하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다. 런던 항의방문에 나선다는 소식에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가서 본사의 책임을 묻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긴 비행시간 동안 건강 이상이 염려된다며 병원이 극구 말렸고, 안씨는 영국행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자 어린아이를 잃은 아빠와 아내를 잃은 남편 등 유족들이 나섰다. 하마터면 다른 아이들처럼 세상을 등질 뻔했던 여덟 살 나래도 아빠 강찬호 대표의 손을 잡고 항의방문단에 합류했다. 나래의 폐 한쪽은 딱딱하게 굳은 ‘섬유화’ 상태다. 런던시내 국회의사당과 트래펄가 광장 그리고 레킷벤키저 본사 앞에 피해 사진과 옥시싹싹 제품을 전시한 뒤 자리를 깔고 앉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작은 여자아이 나래에게 향했다. 나래와 같은 처지에 있던 아이와 엄마, 아빠 100여명이 숨졌다는 말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래는 한번도 짜증을 내거나 울지 않았다. 펼침막(플래카드)을 든 어른들의 입속에 과자를 넣어주며 웃음을 불렀다. 폐가 딱딱하게 굳은 나래가 마음이 딱딱하게 굳은 어른들을 위로해주었다.

가습기 살균제 유족·피해자들이
영국 본사 ‘레킷벤키저’에 갔다
100명 사망자 ‘옥시싹싹’의 그 기업
“소송 중이니 언급할 수 없다”
세 번 만났지만 사과는 없었다

영국 슈퍼 세제코너 절반이
그 회사 제품이었는데도
영국과 세계는 이 사실 몰랐다
‘가디언’ 보도로 파문 일었고
유족들은 영국 법원에 제소키로

강나래 어린이가 지난 22일 영국 런던 근교 슬라우의 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촛불을 들고 기도하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포도를 가져온 할아버지

레킷벤키저 제품이 한국에서 수많은 이의 불행을 몰고 왔다는 사실을 런던 시민들은 알고 있을까? 항의방문단이 묵은 한인 민박집 부엌의 세제 4개 중 2개가 레킷벤키저 상품이었고, 런던 슈퍼마켓의 세제 코너 절반이 옥시싹싹을 만들어 판 바로 그 회사 제품들이었다. 자신들이 늘 집에서 사용하는 제품 중 하나가 수백명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어찌 금방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시위 사흘이 지나면서 오가던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이냐고 와서 묻기도 하고 안타까운 얼굴로 나래를 바라봤다. 지난 이틀 동안 무심코 지나쳤는데 미안하고 잘 해결되기 바란다며 일일이 악수를 청해온 흑인 청년도 있었다.

고작 출퇴근 차량을 향해 서너 시간 동안 펼침막을 들고 서 있는 게 레킷벤키저 앞에서 항의단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인터넷 지역언론 활동을 하는 ‘폴’이라는 노인이 취재차 왔는데 마지막날 한 손에 생수 봉지를, 다른 한 손엔 바나나와 포도가 든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산업보건운동가 여럿이 지지 방문을 해주었고 기업감시 운동을 하는 단체한테서 연락을 받은 영국의 유력 일간지 <가디언>의 기자가 취재해 갔다.

<가디언>은 5월24일 사진과 함께 장문의 기사를 냈다. 이 신문은 레킷벤키저가 지난해에만 3조7천억원의 이익을 낸 영국 100대 기업이라고 소개하며, 한국 정부로부터 과장광고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고서도 법원 소송을 핑계로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영국은 물론 유럽의 시민단체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부를 둔 환경단체 ‘보스엔즈’(Both Ends)의 정책 담당 비르트씨는 “유럽연합에서 바이오사이드(biocide: 살균제 같은 살생물제) 문제를 별도로 다루는 법을 두고 있고, 사람들은 살균 성분이 든 생활용품의 사용을 매우 조심스러워한다”며 “한국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바이오사이드 사건에 유럽 시민사회가 크게 놀라고 있다. 관련 소식을 적극적으로 알리겠다”고 말했다. <가디언>의 기사 중 항의단의 일원인 서울대 백도명 교수와의 인터뷰가 있다. “옥시싹싹을 만들어 판 레킷벤키저라는 회사가 건강, 위생, 가정을 추구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소비자의 건강을 파괴했고, 가정에 질환을 가져다줬고, 결국 가족을 해체시켰다.”

피해자들은 변호사 1200명이 소속된 대형 로펌과 100명 규모의 중견 로펌의 변호사들을 각각 만나 영국 법원에 제소하는 방안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나눴다. 이들 변호사들은 이 문제가 민사소송은 물론이고 형사소송도 가능하다는 견해를 내놨다. 레킷벤키저의 무책임한 태도를 확인한 피해자들은 영국 법원에 제소할 뜻을 밝혔다. 변호사들은 또 이 문제를 유엔의 인권기구에 제소하여 제조사들의 책임 회피를 알려야 한다는 항의방문단의 의견에도 적극 동의하며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또한 덴마크에서 원료가 수입돼 피해자를 발생시킨 ‘세퓨’ 가습기 살균제에 대해서도 덴마크 시민사회에 적극 알리고 법적인 책임을 묻는 방안도 향후 추진하기로 했다.

항의방문단이 영국을 방문 중인 5월20일에는 <유럽방사선의학회지>에 국내 의학전문가들이 작성한 학술 논문이 실렸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어린이들에게 발생한 간질성 폐질환이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사망자와 생존 환자 간의 폐 시티(CT) 사진 판독과 조직병리학적 증거 비교를 통해 밝힌 내용이었다. 가습기 살균제의 치명적 영향이 학술적으로 또 한번 공인된 셈이다.

최악의 바이오사이드

20대 초부터 환경운동을 해온 필자에게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피해 규모는 말로만 들어온 196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미나마타병 사건이나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 발생한 탈리도마이드 사건과 같은 크기로 다가왔다. 선진국 소속의 다국적기업의 한국 지사가 수많은 피해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1984년 인도에서 발생한 보팔 참사도 떠올랐다. 어떤 이는 지구촌 최악의 생활용품 ‘바이오사이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해충을 없애는 ‘페스티사이드’(pesticide)를 농약이라고 하는데, 바이오사이드는 생활 속에서 세균이나 미생물을 살균하는 모든 종류의 제품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가습기 살균제라는 제품은 가습기 물통에 부어넣는 농약과 마찬가지다. 겨울철 어린아이와 산모 그리고 아빠가 한방에 모여 잠을 자면서 밤새 분무되는 농약에 노출된 결과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인 것이다.

4년을 이 사건에 매달렸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품을 외국 기업과 국내 대기업들이 앞다퉈 18년간 20여종을 팔았고 국민 800만명이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2011년 정부가 긴급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 해당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나 학계, 언론 심지어 환경단체 어느 곳 한군데에서도 안전상의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로 인해 현재까지 사망자만 무려 142명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다 되도록 가해 기업이 일언반구 피해 대책은커녕 사과 한마디 안 한다는 사실이.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환경보건학 박사 choiyy@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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