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네팔인들 보며 마음 미어져"

고영득 기자 2015. 5. 27.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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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구호 활동 마치고 귀국한 엄홍길 대장 '눈시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에 있는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던 남편은 부인이 둘째 아이를 출산하자 잠시 귀국했다. 강도 7.9의 지진으로 천지가 흔들리던 그날, 남편은 밭일을 하고 있었고, 아내는 집 안에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옆에서 놀던 여섯 살배기 딸과 함께 아내는 순식간에 무너진 집에 깔렸다. 잔해를 걷어내니 아기는 숨진 엄마 품에서 옅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한적십자사 긴급구호대장으로 네팔에 갔던 산악인 엄홍길 대장(54)이 차우타라 지역에서 들은 가슴 아픈 이야기다. 27일 경향신문과 만난 엄 대장은 이 사연을 전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3주간 상황 조사와 긴급구호 작업을 마치고 지난주 귀국했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 네팔에 있는 듯했다. 네팔과 인연을 맺은 지 30년 된 엄 대장에게 이번 지진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초토화” “절망”이란 말을 반복하던 그의 입에서 ‘희망’이란 단어가 나오기엔 아직 힘들어 보였다.

“한순간에 살 곳을 잃은 그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죠. 그렇다고 누굴 탓하거나 원망하며 울부짖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홍길 대장이 지난 8일 네팔 지진 진원지 인근인 다딩 지역의 컬레리 마을에서 주민과 함께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끔찍한 재난을 당했지만 그들은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는 듯했다고 엄 대장은 전했다. 그가 카트만두에 도착한 첫날, 오랜 지인인 현지 신문 ‘라이징 네팔’의 기자(51)가 찾아왔다고 한다. 그 기자는 도와주러 와서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지진으로 8명의 친·인척을 잃은 유족이었다. 엄 대장은 “그 친구는 ‘나보다 더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다’며 취재현장을 누볐다”면서 “자연이 안긴 고통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네팔 사람들의 초연함을 보면서 마음이 미어졌다”고 했다.

이번 강진의 진원지는 고르카주 만드레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엄 대장에게 이곳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이 돼 버렸다. 엄홍길휴먼재단과 함께 지난달 이곳에서 13번째 학교 착공식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 지 보름 만에 지진이 일어났다. 엄 대장은 “다른 일정 때문에 착공식을 2주 앞당겼는데, 예정대로였다면 1차 강진을 직접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엄 대장은 지난 10일 이곳에서 2차 강진과 맞닥뜨렸다. 구호물자를 실은 차량이 산간마을로 들어가지 못해 주민 1000여명이 산 아래 공터로 내려와야 했다. 낮 12시50분쯤 갑자기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한쪽으로 뛰기 시작할 때까지 엄 대장은 영문을 몰랐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맞은편 산의 한쪽 면이 삭둑 잘라져 내려앉더라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흙먼지가 덮쳤습니다. 순간 저는 공황상태에 빠졌지요. 주민들이 구호물자를 받으러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지진 피해 지역이 대부분 산간오지 마을이라 구호물자나 인력이 드나들기 힘든 상황이다. 엄 대장은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했다. 본격적인 우기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엄 대장은 “두 차례 강진으로 가뜩이나 약해진 도로나 산비탈이 유실되면 마을 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된다”며 “비를 피할 수 있는 천막이나 지붕 있는 건물이 절실하다”고 했다.

두 차례 강진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934년 지진 때 숨진 8519명을 이미 넘어선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 지역을 다 돌아보지 못해 안타깝다는 엄 대장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소나기를 피해 무너진 지붕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들 모습이 눈에 밟힙니다.”

<고영득 기자 god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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