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공포' 아무도 자유롭지 못한 여의도

박홍두 기자 2015. 4. 17.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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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어야 정치할 수 있는 나라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이란 어떤 의미일까?

현역 국회의원 10여명에게 물어봤다. 대부분 "정치를 하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라고 했다. 초선 ㄱ의원은 "돈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멋쩍게 웃었다. 재선 ㄴ의원은 "다른 데 손 안 벌리려고 내 아파트까지 담보 잡히면서 빚을 졌다"고도 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기업체나 남에게 손을 벌리는 의원들도 종종 있다"(야당 3선 의원)고 한다.

최근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여의도 정가(政街)에 긴장감이 흐르는 것도 이 같은 '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인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많다.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이 처한 곤경이 '남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돈이 없거나 모자라다 보니 '검은돈'의 힘을 빌리게 되고, 이른바 '공생관계'가 시작되면 헤어나오기가 힘들다. 이처럼 정치인들에게 '돈'은 메피스토펠레스(독일 작가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이다.

경기도민과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2005년 10월2일 선관위 마스코트 '공명이'와 함께 깨끗한 정치자금 기부문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대선 1000억 이상, 총선서 수백억

돈 문제의 시작과 끝은 정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에 있다. 이겨서 '배지'를 달아야 자신의 정치를 펼쳐 보일 수 있는 현실에서 선거 승리를 위해선 돈이 절실하다.

하지만 현행 정치자금법상 돈이 나올 '구멍'은 3곳뿐이다. 국가가 주는 국고보조금, 선거관리위원회가 배분해주는 기탁금, 당원의 당비 등이다. 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 등 거대 양당의 경우 국회 의석수 등에 따라 수백억원에 이르는 국고보조금과 기탁금이 주어진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느끼는 현실은 다르다. 총선에선 10% 이상 득표해도 사용액의 50~60%만 국가가 보전한다. "웬만큼 재력 있는 사람만 출마할 수 있는 구조"라는 자조 섞인 말들이 나오는 이유다.

이 때문에 음성적인 후원금 문화도 여전하다고 정치권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지역구 유지들이나 기업인이 잠재적인 후원자인 경우가 있는데, 하다못해 사무실 비품을 사는 등의 비용까지 회계처리를 다 하긴 그래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을 받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대선의 경우는 액수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커진다. 재벌·대기업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무더기로 받는 식이다.

공식적으로 대선 후보는 본인 자산에 더해 정당보조금 등 당비, 후원 및 기부금을 토대로 선거자금을 쓰게 돼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게 관계자들의 얘기다. 2012년 한 후보의 대선 캠프 관계자는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 이후로 많은 게 바뀌었다"며 "당 사무총장이 수입과 지출을 총괄했었지만, 2007년 대선쯤부터는 조직과 직능을 총괄하는 쪽에 돈이 집중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과박스로 수십억, 수백억원을 나르는 식이 아니라 금액도 눈에 덜 띄게 수억원대 이하로 "소소해지는 추세"라고도 했다.

전국 선거라 퍼져 있는 조직의 운영을 다루는데 비용이 많이 들고, 직업군·지역별로 다양한 단체들의 리더들을 만나 관리하는 것이 곧 후보에 대한 무더기 지지 표로 연결되기 때문에 일반 시민보다 더 공을 들이는 것이다. 다른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400억원대를 썼다면 조직과 직능 쪽에서는 그만큼 이상을 비공식적으로 더 썼다는 얘기도 많다"고 말했다.

이는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에 대한 의혹에서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리스트에 이름이 거론된 새누리당 홍문종 의원, 서병수 부산시장, 유정복 인천시장은 각각 2억∼3억원씩을 건네받은 의혹이 제기됐다. 2012년 대선 때 서 시장은 새누리당 사무총장으로 선거대책총괄본부장을, 유 시장은 직능총괄본부장, 홍 의원은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았다.

앞선 2002년 대선에서도 대기업들로부터 받은 대선자금 사건이 터졌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SK, 현대자동차, 한화건설 등에서 불법 정치자금 32억여원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고, 한나라당은 불법 자금이 실린 차를 통째로 받는 '차떼기'로 삼성, LG, SK 등으로부터 575억원을 받았다. 여야 정치인 19명이 기소됐다.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경선 때의 돈 거래 의혹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 의해 불거진 상태다. 성 전 회장이 박 후보 캠프 직능총괄본부장이던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현금 7억원을 건넸다고 주장한 상태다.

이 같은 '검은 커넥션'은 공생관계를 넘어 '족쇄'가 될 수 있다. '받은 만큼, (국회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의원 보좌관은 "가끔 평소 본인 소신과 너무나 다르게 판단해 입법안 찬반을 바꾸는 의원들은 (불법 후원을 받았다는) 의심을 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비현실적 제도… '쪼개기' '꼼수' 여전

정치권에선 제도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2004년 개정된 일명 '오세훈법'이다. 당시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이 발의한 이 법은 기업 등 법인·단체의 정치후원금 금지와 물 먹는 하마로 불린 지구당 폐지 등을 골자로 했다. 거액의 뭉칫돈이 들어오는 통로를 틀어막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역효과도 만만치 않았다. 지구당 폐지는 '비싼 정치'를 바꿔냈지만 풀뿌리 정치를 약화시켰다는 혹평을 받는다. 지역구 후원회 사무실은 둘 수 있어도, 거기서 당원 모임이나 선거 관련 논의 등의 활동을 하면 불법이다. 한 3선 의원은 "지역구 민원을 듣는 게 내 역할인데, 사무실에선 하지 말고 카페 같은 데 가서 하라는 거냐"고 했다. 현역 의원이 아니면 지역 사무실 자체도 둘 수 없다.

500만원까지 개인 후원 한도를 제한해 소액 다수의 후원을 유도했지만, 이 역시 돈 없는 의원들은 '눈물겹다'. 상당수가 자신의 명함 한쪽 면에 후원계좌 번호를 깨알같이 적어두고 있을 정도다. 회계연도가 끝나는 매년 연말만 되면 '후원을 바란다'는 호소성 짙은 단체 문자메시지도 열심히 돌린다. 특히 지난해 말부터는 단골 후원 행사인 출판기념회까지 여야가 모두 자발적으로 하지 않기로 결정해 돈줄은 더욱 막힌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꼼수가 등장한다. 10만원 이하 후원금은 익명으로 기부할 수 있도록 하고, 세액공제 혜택을 주고 있는 점을 이용하는 식이다. 기업이나 이익단체가 직원·회원 명의로 뭉칫돈을 소액으로 쪼개 후원하는 것이다. 음성적 '뒷돈'이 아니라 공식 후원계좌로 받은 돈이지만 입법로비나 청탁 수단으로 연결되는 사례가 나오면서 최근까지도 수사대상에 오른 사건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 '개방과 견제' 모두 강화해야

무엇보다 현행 정치자금법 제도 개정이 먼저라는 얘기가 많다. 지난 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정치자금법 개정 필요성을 공식 제기했다. 시·군·구당이 직접 당원을 관리하고 당비를 받을 수 있도록 했고, 중앙당 지원도 가능하게 하자는 등의 개정 의견을 냈다. 사실상 지구당을 부활시켜 지역구 정치인의 후원금 모금 압박을 덜어주는 방식이다. 또 법인과 단체가 선관위를 통해 1억원까지 기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돈 문제로 인한 정치불신 해소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선거 등 정치를 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크다는 게 근본적 문제라는 것이다. 조성대 한신대 교수는 "법인·단체 등의 정치자금 모금 제한까지도 개방하고, 선관위를 통해 더 강한 감시를 한다면 정경유착 등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에 앞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국민의 정치불신을 불식하는 노력도 함께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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