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 팽목항의 사람들] 실종자 가족들 "제발 인양만 해 달라".. 슬픔 달래가며 기다리는 사연들

팽목항 입력 2015. 4. 1. 02:14 수정 2015. 4. 1. 09:2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정도 돈 받았으면 됐지' 하는 사람들의 오해·편견도 견뎌야.. 타인의 기억·관심 절실히 필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의 농담과 웃음 뒤편에서 그 속은 하얗게 타들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만난 그들은 참사로 동생과 누나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동생과 누나는 아직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간의 대화에서 희망은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이들을 버티게 하는 힘이 타인의 기억과 관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밥, 반찬, 쪽지

이영호(46)씨의 큰누나 영숙씨는 아들과 함께 살려고 제주도로 가던 길에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다. 이씨는 이튿날인 지난해 4월 17일 진도에 내려와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처음 석 달간은 하루에 한 끼도 먹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고 술과 담배에 의존했다. 갑자기 숨이 가빠 병원에 갔더니 "당장 폐 수술을 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지난해 8월 양쪽 폐에 칼을 댔다. 작은누나는 참사 이후 화병으로 쓰러져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이씨는 "아들 심정은 오죽하겠느냐"고 했다.

큰누나는 아들이 세 살 때 이혼했다. 그리고 부산에서 상경해 이씨와 살기 시작한 게 25년 전이다. 이씨가 먼저 서울에서 집을 구해 생활하고 있었다. 집이 있으니 그냥 와도 된다고 했지만 누나는 이불 두 채를 싸들고 그 먼 길을 올라왔다. "지금도 누나를 생각하면 그걸 이고 지고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온 장면이 떠올라서 …."

누나는 아들을 두고 서울에 올라와 19년간 바깥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10여년 만에 연락이 닿은 아들의 대학 등록금이라도 대주려고 붕어빵 장사를 했다고 한다. 지난해 4월 16일엔 아들이 있는 서귀포에 일자리를 얻은 다음 이삿짐을 싣고 가던 중이었다. 이씨는 "그렇게 고생한 사람이 이제야 맘 편히 사나 했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그냥 서울서 나랑 같이 살았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만 든다"고 말했다.

그 누나가 지난해 10월부터 자꾸 꿈에 나온다. 같이 여행 갔던 곳, 같이 먹은 음식 등이 생생하게 떠올라 힘들다고 이씨는 말했다. 정신과 의사는 꿈이 아니라 옛 추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라 말해줬다고 한다.

이씨는 건설현장에서 일했었다. 참사 이후에는 벌이가 중단됐다. 형편은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는 서울 면목동 주민과 교인들이 성금을 건넸다. 이씨는 개인적으로는 받지 않겠다며 세월호 희생자 후원 계좌로 넣어 달라고 했다. 그는 "차마 못 받겠더라. 그랬더니 대신 반찬을 해다 주시고 밥 해주시고. 내가 거의 팽목항에 있으니까 빈집에 쪽지 남기고 가시고. 그렇게 기억해주시는 이웃들이 있어서 그래도 지금까지 버텼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건설현장 일을 다시 시작했다. 주중에 가서 일하고 주말에 팽목항으로 돌아온다.

"엄마 왜 전화 안 받아"

권오복(55)씨는 세월호 참사로 동생 내외와 조카를 잃었다. 재근씨는 제주도에서 감귤농장을 하려고 처자식과 세월호에 올랐다. 침몰 현장에서 딸 지연(5)양만 건져졌다. 베트남 출신 아내 한윤지(당시 29세)씨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재근씨와 아들 혁규(당시 6세)군은 공식적으로 실종 상태다.

권씨는 참사 당일부터 지금까지 세월호 관련 일정이 아니면 팽목항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지난 23일 서울 기자간담회, 지난해 12월 3일 해양수산부 방문 등에 참석한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진도를 떠나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는 "세월호 일정으로 길을 떠날 때도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저녁만 되면 잠을 청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고 했다.

기자가 만난 권씨는 팽목항 인근 세월호 희생자 가족 숙소에서 2시간 넘게 바닷바람을 맞으며 쓰레기를 치웠다. 상주하는 자원봉사자가 한 명이라 웬만한 일들은 희생자 가족이 알아서 한다. 권씨는 "나는 이제 '만성'이 됐다. 폐지 정리 2시간씩, 이렇게 허드렛일이라도 하면서 동생과 조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한 명의 유일한 자원봉사자는 해남에서 온 사람이었다. 지난해 8월 10일 진도실내체육관 봉사자로 와서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주방 정리를 마친 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는 "매번 똑같은 얘기고 저는 드릴 말씀이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권씨는 "혼자 다 해주시는 자원봉사자에게 늘 미안하고 감사하다. 때때로 오는 봉사자도 아주 반갑다"고 말했다.

홀로 살아 돌아온 지연이는 권씨의 막내여동생이 돌보고 있다. 종종 엄마 아빠 오빠를 찾는다. 엄마 이름을 휴대전화에서 직접 찾아 걸어 보고 "안 받는다"며 찾을 때도 있다. 어린이집 원장이 종이배를 만들어줬을 때는 "배가 넘어졌다"는 말을 했다며 권씨는 안타까워했다.

그들은 오해도 견디고 있었다

"세월호가 지겹다는 사람들은 '그 정도 받았으면 됐지 얼마나 더 받아야 하느냐'고 하던데 희생자 가족 중엔 돈 그림자도 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 오히려 생계가 막막해지고 당장의 세금도 못 내고 전화요금도 못내는 가족이 수두룩하다." 권씨는 분통해했다. 실종자는 사망자와 달리 법정대리인이 없어 지원이 어렵다고 한다. 선박 사고는 1년이 지나야 가(假)사망 처리가 되고 추가로 가정법원에서 판결을 받아야 한다.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 팽목항 담당 총무를 맡고 있는 김성훈씨는 저녁이 다 돼서야 돌아왔다. 사망자인 단원고 2학년 9반 진윤희양의 삼촌이다. 그는 아르바이트하러 강원도 춘천까지 갔다가 퇴짜 맞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김씨 역시 참사 이후 팽목항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의료보험료, 전화요금, 지방세 등을 못 낸 지 오래다. 의료보험은 차압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이씨는 "우리가 아직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서울 가면 '보상 얼마나 받았냐'고 묻는데 가슴이 무너진다. 해결된 게 하나도 없는데 그런 말 들으면 가슴이 턱 막힌다"며 답답해했다. 권씨는 "이제 오직 인양 생각뿐이다. 재조사한 게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 총리실로 갈 텐데 거기서 제발 인양 결정을 해주길 바라고 있다. 지난 5월부터 인양 조사를 꾸준히 해 왔는데 그걸 다시 재조사한 것부터 속상하다"고 말했다.

팽목항=강창욱 전수민 기자 kcw@kmib.co.kr

[관련기사 보기]

▶ [르포] 다시 찾아온 4월, 다시 가보니… 팽목항의 봄! 슬픔을 넘는다

▶ [다시 4월… 팽목항의 사람들] 故 권순범군 어머니 최지영씨 "우리 아들, 인생 연장 수업하러 간 거예요"

▶ [다시 4월… 팽목항의 사람들] 실종자 가족들 "제발 인양만 해 달라"… 슬픔 달래가며 기다리는 사연들

▶ [다시 4월… 팽목항의 사람들] 숙소와 분향소·세탁실·식당 갖추고 노란리본 맨 개·고양이도 함께 생활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뉴스 미란다 원칙] 취재원과 독자에게는 국민일보에 자유로이 접근할 권리와 반론·정정·추후 보도를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고충처리인(gochung@kmib.co.kr)/전화:02-781-9711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