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공조 드라마, 18년만의 해외비자금 몰수

2015. 3. 7.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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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전두환 재산추적

▶ 전두환, 참 식상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비판도 식상하게 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따져보면 '전두환과 관련된 팩트'는 식상하지 않습니다. 비판은 많았으나 조사는 적었습니다. 한-미 형사사법공조를 통해 전 전 대통령 은닉 재산 일부가 추징됐습니다. 그의 국외 재산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처음입니다.

18년 걸렸다. 뇌물·내란죄 혐의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97년 4833억원의 추징금 확정 판결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전 전 대통령의 국외 은닉 재산이 추징될 예정이다. 수사기관과 법원의 판결 등을 통해 그의 국외 은닉 재산의 실체가 규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법무부는 전 전 대통령 차남 전재용씨, 부인 박상아씨, 박씨 어머니 윤양자씨와 이들의 투자법인인 '포트 만레이 트러스트' 등이 미국에 보유한 자산 122만6951달러에 대해 캘리포니아 중앙지방법원 등에 제기한 '민사몰수'(civil forfeiture) 소송에서 112만6951달러(약 12억3000만원)를 몰수하는 조정에 3명과 합의했다고 지난 4일(현지시각) 보도자료를 내어 밝혔다. 미국 법무부는 누리집(홈페이지)에 공개한 보도자료에서 "대통령 재직 시절 전 전 대통령의 일련의 부패·뇌물 행위는 한국민의 신뢰를 배신하고 정부의 중요한 재원을 빼돌리고 법치주의를 약화시켰다"며 "외국 관료가 부패로 형성한 재산을 숨기는 돈세탁 천국으로 미국이 기능하는 것을 그냥 바보처럼 지켜보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냥 '몰수'가 아닌 '민사몰수'인 이유

2년 만의 성과다. 미 법무부의 이번 '조정 합의'(settlement agreement)는 한국 검찰과 형사사법공조를 통해 얻은 결과다. 전 전 대통령은 1997년 유죄 확정 판결 이후 2013년 8월까지 추징금 중 1672억원을 미납한 상태였다. 2013년 추징시효가 만료될 상황에 처했다. 채동욱 검찰총장 때 미납추징금 특별수사팀이 만들어졌다. <한겨레>, <뉴스타파> 등 언론의 은닉 재산에 대한 탐사보도가 이어졌다. 국회에서 전 전 대통령의 은닉 재산을 겨냥해 '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이 개정됐다. △범인 외의 자가 그 정황을 알면서 취득한 불법 재산 및 그로부터 유래한 재산에 대해 추징할 수 있고 △추징금의 집행시효를 10년으로 연장한다는 두 조항이 핵심이다. 법무부는 2013년 8월 법 개정을 계기로 미국 법무부에 형사사법공조를 요청했다. 전 전 대통령 가족이 미국에 도피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의 추적과 몰수를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두개의 재산을 찾아냈다. 미국 법무부 보도자료를 보면, 미 법무부는 재용씨가 2005년 캘리포니아 뉴포트비치에 구입한 주택 매매 대금 72만1951달러를 찾아냈고 캘리포니아 중앙지방법원으로부터 압수영장을 받아 지난해 2월 압수했다. 미 법무부는 뉴포트비치 주택에 대해 보도자료에서 "전 전 대통령의 돈세탁된 부정한 자금으로 (주택을) 구입했다"고 밝혔다. 한국, 미국 검찰은 물론, 미국 연방수사국(FBI)도 '클렙토크라시 프로그램 오브 디 인터내셔널 커럽션 유닛'(국제 부패 클렙토크라시 유닛)이 함께 수사에 참여했다.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는 '도둑정치'로 번역된다. 권력자가 막대한 부를 독점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하는 용어다.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미국 법무부는 자금을 발견한 직후 재용씨 등을 상대로 캘리포니아 중앙지방법원에 '민사 몰수' 소송을 제기했다고 지난해 4월24일 밝혔다. 민사 몰수 제도는 한국에 없는 독특한 제도다. 한국 형법(41조)에서 몰수는 범죄에 연루된 재산을 국가가 가져가는 형사처벌이다. 한국 형법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민사 몰수'라는 단어나 '몰수 조정에 합의했다'는 문장 자체가 형용모순으로 들릴 수 있다.

민사 몰수 제도는 검경이 범죄나 불법행위 혐의자를 기소하거나 유죄의 확정 판결을 받지 않고 범죄에 연루된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절차다. 물론 형법상 몰수형도 공존한다. 민사 몰수 제도는 수백년 전 영국 해상법상의 탈세물건 몰수 판례에서 기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1930년대 금주법 시대에 밀주 단속 과정에서 민사 몰수 소송이 급증했다고 전해진다. 확정 판결 전에 진행이 가능해 소송비용·시간이 적게 든다는 특징이 있다. 미국 안에서 논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포스트> 보도를 종합하면, '정당한 법 집행 절차'를 규정한 수정헌법 14조에 위배된다는 등의 이유로 폐지 의견이 적지 않다. 미네소타 주의회는 지난해 민사 몰수 제도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두번째 은닉 재산도 발견됐다. 미 법무부 보도자료를 보면, 법무부는 재용씨 부인 박상아씨가 '펜실베이니아 합자조합'(Pennsylvania Limited Partnership)에 투자한 돈 50만달러를 찾아내 펜실베이니아 동부지방법원에 압수영장을 지난해 8월22일 청구했고 펜실베이니아 동부지법은 같은 해 9월 압수영장을 발부했다. 미 법무부는 이어 올 2월18일 이 투자금에 대해 민사 몰수 소송을 제기했다. 이 투자금은 재차 필라델피아의 '미국이민기금'(US immigration fund)으로 재투자됐다. 누리집을 보면, 미국이민기금은 비미국인과 그의 가족이 미국에서 진행 중인 사업에 투자해 미국 영주권이 허락되는 'EB-5' 비자를 얻게 도와주는 사기업이다. 지난 5일 미 법무부의 발표는 양쪽이 몰수에 관해 민사소송처럼 '조정 합의'에 다다른 결과다. 미 법무부는 몰수에 합의한 112만6951달러 가운데 소송비용 등을 제외한 나머지를 서울중앙지검 추징금 수납계좌로 송금할 예정이다.

'공무원범죄 몰수특례법' 개정 뒤미 법무부에 형사사법공조 요청결국 미국 도피시킨 재산 찾아내캘리포니아 법원에 소송 제기 뒤112만6951달러 몰수에 합의하다국외재산의 정식 발견·몰수는1997년 유죄 판결 이후 처음전재용씨쪽은 부인 박상아씨의미국 영주권 재신청에 미국이반대 안하는 조건으로 동의해줘

전재용씨는 왜 확정판결 기다리지 않았나

미국 법무부가 밝힌 조정 합의 결정문을 보면, "청구인(재용씨 쪽)은 이후 항소 등 어떤 다른 법적 쟁송도 제기하지 않으며 또한 이번 몰수를 가로막거나 지연시키거나 방해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결정문에는 재용씨 쪽이 왜 확정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조정에 합의했는지 구체적 이유는 적시돼 있지 않다.

이번 조정 합의에서 박상아씨의 영주권 신청 문제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사실이 결정문에서 드러났다. 결정문을 보면, 양쪽은 "몰수가 집행되고 난 뒤 2년 이내에 피청구인 박상아씨가 미국 국무부에 '리터닝 레지던트 지위' 신청 소송을 낼 경우 미 법무부는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 '리터닝 레지던트 비자'는 해외에 1년 이상 거주한 미국 영주권자가 다시 미국에 거주할 때 따야 한다. 박상아씨는 자녀 교육 문제로 미국을 수시로 떠나 이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해 재용씨 쪽도 확정 판결을 기다리기보다 조정에 응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5일 재용씨 쪽을 대리한 미국 변호사에게 전자우편으로 '몰수에 합의한 이유' 등 재용씨 쪽 입장을 물었으나 답이 오지 않았다.

한국 법무부 국제형사과는 지난 5일 보도자료를 내어 "미국 법무부와의 직접 공조를 통한 국내 환수 조치의 첫 사례로서, 범죄수익 환수의 실효성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정진우 국제형사과장은 '왜 미국이 형법의 몰수형이 아니라 민사 몰수 소송을 제기했느냐'는 질문에 "미국 쪽 판단이다. 미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우리 정부의) 요청사항을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걸로 안다"며 "형사사법공조 관례상, 우리 쪽에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기 어렵다"고 <한겨레>와 통화에서 밝혔다. '박상아씨 비자 문제가 조정 안건이었는지' 등 구체적인 사법공조 내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 국외 은닉 재산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발견되고 몰수된 첫 사례라는 점이 주목받을 만하다. 그의 국내 재산은 1988년 5공 청문회, 1996년 내란죄·뇌물죄 수사 때 처음 수사됐다. 그러나 국외 재산은 수사 여력상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수사팀에 있었던 김용철 광주시교육청 감사관은 2013년 <한겨레> 인터뷰 때 "그땐 스위스은행이 고객 정보를 정부에 제공하지 않던 시절이다. (국외 재산 수사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2004년 당시 대검 중수부 소속이던 유재만 변호사가 재용씨 탈세 사건에서 전 전 대통령 비자금을 밝혀낼 때도 국외 재산은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모두가 5공이라는 한 시대에 대해 침만 뱉고 말았지 그 시대에 빚어진 우리의 문제들이 진실로 무엇이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은 거의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도무지 뭐가 뭔지도 모르는 가운데 어느새 화면에는 '끝'자가 나온 격이었다." 1988년 5공 청문회를 취재했던 이장규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에서 5공 청문회를 이렇게 평가했다. 18년 걸렸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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