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보상안이 뉴챌린지의 서막인가

입력 2015. 1. 30. 12:50 수정 2015. 1. 3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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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삼성이 내놓은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보상 기준 적용해보니 피해 사례 10건 중 최대 3건꼴만 자격 주어져

"위로금 차원에서 보답한다면 모든 암, 희귀난치성 질환까지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도전. 2015년 삼성의 열쇳말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1월19일 호텔신라에서 열린 삼성그룹 신임 임원 부부동반 만찬 행사에서 "올해도 더 열심히 도전하자"는 건배사를 건넸다. 1월2일 시무식에서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뉴챌린지 리스타트(새로운 도전, 다시 시작하자)의 원년"이라고 강조했다. '도전'이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 숨은 뜻이 담겨 있다. 삼성전자 실적이 좋지 않으니 분발하자는 의미도 있지만,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에 이 부회장이 홀로 맞는 첫해이니만큼 새롭게 시작해보자는 '뉴'(new)에 강조점이 찍힌다.

그러나 아직 '이건희 체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국회에서는 이른바 '이학수 특별법'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이 부회장을 비롯한 3남매의 삼성SDS 주식도 부당이득으로 국가에 환수될 대상이 될지 모른다. 삼성SDS와 제일모직 상장으로 이 부회장의 주머니에는 수조원이 채워졌다. 그러나 편법적 부의 세습에 대한 사회적 반감도 그만큼 커졌다. '이재용 체제'를 위해 사업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내쳐진 직원들은 승계의 희생양이 됐다며 회사 매각 저지 투쟁에 나섰다.

삼성은 서둘러 그림자를 지워보려고 한다. 3세 승계에 앞선 사회적 정당성 확보 차원이다. 지난 1월16일 처음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기준을 공개한 것도 어쩌면 삼성에 또 하나의 도전이다. 하지만 삼성이 인정하는 '또 하나의 가족'은 소수뿐이다. <한겨레21>이 삼성이 제시한 기준에 맞춰 피해 사례 166건을 분석해봤다. 10명 중 최대 3명 남짓만 삼성의 위로금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재용 체제의 삼성은 과연 낡은 과거와 결별할 준비가 돼 있을까? 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내야, 도도히 흘러간다. _편집자

"순옥이라도 보상 대상에 포함됐으니 잘됐어요."

김은미(43·가명)씨와 김순옥(41·가명)씨는 삼성전자 온양공장 반도체 조립라인에서 함께 일했다. 은미씨는 1991년, 순옥씨는 1992년 입사했다. 3교대제라 교대조는 달랐지만, 둘이 맡은 작업은 같았다. 반도체 칩을 보호하기 위해 에폭시몰딩콤파운드(EMC)라는 화학물질을 고열로 녹여 감싸주는 '몰드공정'이다. 15~20kg 깡통에서 EMC를 덜어 설비에 투입하고, 180℃로 가열된 금형(몰드장비) 속에 직접 머리를 넣어 남아 있는 EMC를 주걱으로 긁어냈다. 그땐 그게 그렇게 위험한 물질인 줄도 모르고 만졌다. 안전교육을 받은 기억은 없다. 생산량을 맞추느라 마스크 등의 보호장비도 없이 뛰어다니기 바빴다. 그러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져 둘은 1998년 나란히 퇴사했다.

같은 일 했어도 보상 시험 통과 어려워

병마는 둘을 차례로 찾아왔다. 퇴사 이듬해에 출산한 은미씨의 아들은 '선천성 거대결장'이라는 병을 앓았다. 아들은 '똥주머니'를 차고 살다가 대장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다음엔 은미씨가 갑상선기능저하증으로 약을 먹기 시작했다. 순옥씨는 2007년 오른쪽 가슴 전체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았다. 유방암이었다. 은미씨도 2010년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갑상선 전체를 제거했다. 은미씨는 그 뒤로도 지금까지 류머티즘, 뇌에 물이 차서 생기는 간질 증상, 상피내암 등에 시달리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같은 공정에서 일했던 선배는 악성림프종으로, 후배는 위암으로 세상을 먼저 등졌다. 아직 30~40대인 여성들이다. 우연치고는 가혹하다. 이들이 근무했던 공정에서는 1급 발암물질인 벤젠, 포름알데히드 같은 유기화합물이 발생할 수 있다(2012년 안전보건공단 <반도체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관리 길잡이>).

삼성전자는 지난 1월16일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 등을 앓게 된 피해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안을 내놨다. 그 소식을 들은 은미씨와 순옥씨는 1월21일 저녁 전화 통화를 했다. 은미씨는 충청남도 온양에, 순옥씨는 대전에 산다. 삼성의 제안대로라면 두 사람의 희비는 엇갈린다. 갑상선암인 은미씨는 보상 대상이 아니다. 유방암인 순옥씨는 삼성이 내놓은 특수건강진단 이력 조건에만 해당하면 보상받을 수 있다. 은미씨는 착잡하다. "처음엔 모든 환경에서 일한 피해자를 다 보상해준다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랑은 무관한 보상안이더라고요. 기대는 조금 했었는데 물거품이 돼버린 거죠." 순옥씨는 "언니가 많이 힘들어한다"며 걱정했다. 은미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다, 경제적으로도 힘든 상태다.

삼성은 과연 직업병으로 의심되는 질환을 앓고 있는 피해자들 가운데 어느 선까지 보상하려는 속내인 걸까? 그리고 실제 몇 명이나 보상받을 수 있을까?

"회사 발전에 기여한 데 대한 보답 차원에서 접근하겠다." 지난 1월16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열린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 2차 회의에서 삼성이 내놓은 '기본 입장'이다. 산업재해 인정 절차처럼 업무관련성을 따지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회사가 퇴직 직원과 가족들의 아픔을 덜어드리기 위해 복지 차원의 위로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은 지난해 5월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피해자들에게 공개 사과하고 "합당한 보상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피해자 모임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과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가족대책위)로 나뉘는 등 협상에 난항을 겪었다. 이에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정위원회를 꾸려 조정을 받기로 했다. 조정위는 삼성의 사과, 피해자 보상, 재발 방지 대책 등에 대한 교섭 3주체의 제안을 받아 권고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한겨레21>은 삼성전자의 제안 내용과 반올림의 협조를 구하여 확보한 166명(삼성전자 반도체·액정디스플레이(LCD) 부문만 해당)의 피해사례를 분석해, 삼성의 제안 기준에 따라 보상받을 수 있는 피해자 규모를 추산해봤다. 질병 종류, 근속기간(재직기간), 퇴사 연도, 병 진단일(발병 시기), 특수건강진단(특진) 여부, 협력업체와 2세 피해자 등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두루 따졌다. 중증 질환이 아닌 피해 사례는 아예 집계에서 제외했다. 다만 반올림에 들어온 제보 가운데 일부 누락된 명단이 있을 수 있다.

기준 확실히 충족하는 피해자는 14명에 그쳐

삼성의 제안에 따른 보상 규모가 구체적인 숫자로 확인된 건 처음이다. 그동안 반올림은 피해 사례 정보를 통째로 공개한 적이 없다. 백수하 삼성전자 상무는 "(얼마나 보상 대상이 될지) 대략 예측은 하고 있지만, 현재 그걸 밝히기는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삼성도 퇴직자 수와 질병별 유병률을 적용해 대략 보상 규모를 시뮬레이션해봤다는 뜻이다. <한겨레21> 집계는 삼성의 제안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조정위가 내놓을 최종 결과와 차이가 클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숫자'가 삼성의 해결 의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가늠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겨레21> 집계 결과, 피해자 163명(전체 피해 사례 166건 중 삼성과 개별 합의한 3명 제외) 가운데 확실하게 삼성의 보상 기준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14명(8.5%)에 불과했다. 삼성이 제시한 여러 가지 단서 조항을 적용하면 107명(65.7%)이 자동으로 보상에서 제외된다. 나머지 42명(25.8%)은 특진을 받았는지가 확실치 않거나, 삼성이 정한 근속기간을 채웠는지 등 개인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다. 이들이 모두 포함된다 해도 보상 대상자는 최대 56명(34.3%)에 그친다. 10명 중 3명꼴로만 보상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삼성은 7개 질병만 보상하겠다고 밝혔다. 백혈병, 비호지킨림프종(악성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전암성질환), 다발성골수종, 골수이형성증후군 등 림프조혈기계암 5종과 뇌종양, 유방암 등 산업재해 승인 이력이 있는 암 2종이다. 산업재해로 신청된 적이 있는 15개 질병 가운데 나머지는 '전문가들의 타당한 근거가 있으면 예외로 논의할 수 있다'고만 했다. 난소암, 갑상선암, 다발성경화증, 만성신부전증 등 10종이 나머지다. 삼성은 백혈병 피해가 알려진 뒤 2011년 '퇴직자 암 지원 제도'를 도입했다. 퇴직 뒤 3년 안에 발병한 14종의 암에 대해 치료비를 지급하는 것이다. 이번에 제시된 질병 포괄 범위(7종)는 회사의 제도(14종)만도 못하다. 보상 대상이 아닌 107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60명(56.1%)은 '7종 질병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라서 제외됐다.

설사 7종의 질병에 해당하더라도 '입시' 치르듯이 여러 단서 조항을 통과해야 한다. 7개 질병에 해당하는 피해 사례 92명(삼성과 개별 합의한 2명 제외)만을 좁혀놓고 보상 여부를 따져봤다. 이 가운데서도 보상 대상이 아닌 사례가 열에 넷꼴로 36명(39.1%)이나 됐다. 제외 이유는 '근속기간(14명)·퇴사기간(10명)·협력업체 소속(8명)·특진 이력(4명)' 때문이다.

삼성은 첫 번째 전제조건으로 '특진 이력'을 요구했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벤젠 등의 특정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노동자를 상대로 정해진 주기에 따라 특수건강진단을 실시하도록 정해놓고 있다. 삼성 쪽은 최근 3년간 반도체 사업부문 생산직의 73%가 특진 대상이었다고 밝혔다. 직원 1만8천여 명 가운데 1만3천여 명이 해마다 특진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특진'의 기억

그러나 특진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억은 다르다. 2003~2010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불량 분석하는 일을 했던 정진주(30·가명)씨는 격년으로 시행되던 특진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량인 반도체 칩을 걸러내려면 핀셋으로 칩을 집어서 화학물질에 직접 담가봐야 한다. 분석실 안에는 화학물질이 가득했는데 얇은 마스크에 비닐장갑만 끼고 일했다. 그런데도 생산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특진 대상이 아니었다." 정씨는 2010년 근무 중 쓰러져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그 뒤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인해 대장 절제술까지 받았다. 법원에서 산재 인정 판결을 받은 고 황유미씨조차 특진 이력이 없다. 유미씨는 2003년 10월 입사해 이듬해 일반건강검진을 받았다. 2005년 특진 대상자였으나 6월 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현재 조정위에 교섭 참가자로 나선 피해자 8명의 역학조사 결과를 봐도, 특진 이력이 있는 사람은 4명뿐이다. 보상 대상인지 아닌지가 불확실한 42명 가운데 85%인 36명은 '특진'에 발목이 잡혀 있다.

또 다른 기준은 근속기간과 퇴직·발병 시점이다. 근속기간은 백혈병 1년 이상, 뇌종양과 유방암 5년 이상이라야 한다. 동시에 퇴직 뒤 10년 이내에 확진 판정을 받았어야 한다. 1996년 이후 퇴직자만 해당된다. 백수하 상무는 "유방암 같은 고형암의 경우엔 암이 생성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최소 5년 이상은 노출돼야 걸린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반올림은 '근속기간 3개월 이상, 퇴직 후 20년 이내', 가족대책위는 '근속기간 1년 이상, 퇴직 후 12년 이내'라는 기준을 제안했다.

삼성의 기준에 따르면, 기흥공장에서 1991년부터 1998년까지 7년간 일한 박민숙(42)씨는 보상을 받을 수 없다. 퇴직 뒤 14년이 지난 2012년 유방암이 발병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직업병 연구자들은 유방암이 발암물질에 노출되고 나서 20년 이후에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무슨 기준으로 퇴직 후 10년에 선을 그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직업병연구센터가 2009년 고 황유미씨 등 백혈병 피해자 5명의 역학조사 결과를 평가하는 회의에 제출된 대외비 자료를 보면, "벤젠에 저농도로 노출되더라도 첫 번째 노출 후 20년 이상 경과된 사람들에게서 골수성 백혈병의 발생이 증가한다"는 연구 자료가 소개돼 있다. 백혈병 잠복기가 평균 5~15년이고, 다른 고형암의 잠재기는 더 길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삼성이 발병 시점을 '퇴직 후 10년'으로 정한 게 결코 관대한 기준이 아닌 셈이다.

박씨가 일했던 기흥공장 반도체 생산 3라인 2층은 '죽음의 엔드팹(웨이퍼 가공공정)'이라고 불린다. 산재 인정 판결을 받은 고 이숙영씨를 비롯해 한 조에 근무했던 20여 명 가운데 10명이 백혈병, 갑상선암, 유방암, 뇌질환(두개강 내 저혈압) 등을 앓고 있다. 특히 불임과 유산 등 생식기 질환 문제가 심각하다. 안전보건공단도 "웨이퍼 가공라인에서 글리콜에테르 화합물에 의한 잠재적 생식독성 영향으로 생리불순, 자연유산, 임신지연 등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들의 몸속에 있는 독성이 2세까지 대물림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박씨의 동료 이아무개씨의 아들은 후두엽성 간질을 앓고 있다.

그러나 삼성은 이들을 보상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한겨레21>이 7종 질병에 해당하지 않는 피해자 70명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분석해봤더니, 포상기태·불임·난소종양을 앓고 있는 사람이 7명, 2세에게서 백혈병이나 기형이 나타난 사람이 6명, 난소암이 4명에 이르렀다.피부암(흑색종) 등은 아직 업무연관성을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외국 반도체 업계에서도 높은 발병률을 보이는 질병이다. 삼성이 보상하기로 한 뇌종양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판결이 나온 것도 지난해 11월이 처음이었다. 현재 직업병이 아니라고 해서 100% 단정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이 위로금 차원에서 보답한다면 모든 암, 희귀난치성 질환, 생식보건 문제까지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위험한 일은 다 협력업체가 맡았다"

삼성은 협력업체 노동자들도 '또 하나의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같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업무상 노출 환경은 똑같다. 하지만 삼성은 "협력업체 부분은 1차적으로 도의적·법률적 책임이 고용한 업체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선을 그었다. 삼성전자 화성공장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2011~2013년 일한 황동규(51·가명)씨는 "위험한 일은 다 협력업체가 맡았다. 결국 삼성전자 공장 안에서 삼성을 위해 일한 건데 그런 점을 고려해주기"를 바란다. 그는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화학약품을 창고에 넣고 다시 기계장치에 연결하는 일을 했다. '발암물질'이라고 표기된 약품들은 작업 과정에서 종종 흘러나왔다. 그는 2013년 피부암(피부T세포 림프종) 진단을 받고 나서부터 낮에는 병원 치료, 밤에는 건물 경비 일을 하며 치료비를 마련하고 있다. 지난해 8월 SK하이닉스는 백혈병 등 직업병에 대한 대책을 발표하면서, 업무 연관성이 있는 협력사 직원들의 지원·보상 대책도 함께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어쨌든 지난 8년 새 삼성이 달라진 건 분명하다. 2007년 고 황유미씨의 백혈병 투병 사실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만 해도 삼성은 "겨우 몇 명이 백혈병에 걸린 건 우연"이라고 주장했다. 그랬던 삼성이 피해자들과 협상에 나서기까지 무려 6년이 걸렸다. 그리고 협상이 시작된 지도 어느새 2년이 흘렀다. 이번에 집계한 피해자 166명 가운데 62명은 이미 세상에 없다. 뜸 들이는 동안 피해자들이 겪을 고통은 가늠할 수조차 없다. 백수하 상무는 "조정위가 질병 종류 등에 대해 다른 안을 제시한다면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안은 아니다. 한 걸음도 물러날 수 없다면 굳이 조정을 받겠다고 했겠냐"며 보상 대상자를 늘릴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마지막 안 아니다"라며 남긴 여지

지난 1월21일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에서 만난 김미선(35)씨는 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18년 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며 좋아하던 17살 소녀의 인생은 180도 달라져 있다. 1997~2000년 기흥공장 LCD라인에서 납땜 업무를 담당했던 미선씨는 2000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반신마비가 왔다. 다발성경화증이라는 희귀난치성 질환에 걸린 것이다. 화학물질 노출, 스트레스 등이 원인으로 알려진 이 병은 척수염, 시신경 손상 등을 일으킨다. 희미하게 형체가 보였던 왼쪽 눈의 상태마저 나빠져, 미선씨는 이제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텔레비전과 휴대전화는 물론 가족들 얼굴도 못 알아본다. 기초생활수급자인 미선씨는 월 40만원씩 드는 주사비가 부담스럽다.

남들처럼 뉴스를 볼 수 없는 미선씨는 삼성이 보상 기준을 내놨다는 소식도 전해만 들었다. "회사를 위해 일하다가 아픈 사람들인데 누구는 보상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는 기준이 뭔지 잘 모르겠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는데. 아무도 몰라요. 눈이 얼마나 답…." 미선씨는 답답하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자꾸만 입안으로 삼켰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한겨레21>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피해 사례를 접수한 166명(삼성전자 반도체·LCD 부문만 해당)의 정보를 바탕으로, 삼성이 제안한 보상 기준에 맞는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 추산해봤습니다. 질병 종류, 근속기간(재직기간), 퇴사 연도, 병 진단일(발병 시기), 특수건강진단(특진) 여부 등을 따져서 정리했습니다. 중증 질환이 아닌 피해 사례는 집계에서 제외했으며, 일부 누락된 명단이 있다면 피해자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삼성 반도체 피해자들의 실태가 어떤지 정확히 공개하는 차원에서 핵심 내용만 추려 전체 명단을 표로 싣습니다.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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