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한국수력원자력이 월성·고리 원전 도면을 유출한 블로거의 사전 경고를 사흘간이나 방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수원의 늑장 대응으로 개인정보와 도면 유출 사고를 막을 '골든 타임'을 놓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수원에 따르면 자신을 원전반대그룹 총회장이라고 밝힌 블로거(아이디 tlsrk112)는 지난 15일 오후 8~9시쯤 네이버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7차례에 걸쳐 원전 기밀을 유출하겠다는 협박 메시지를 올렸다. '12월 10일 모든 원전 장악' '특급보안 원전 설계, 제어프로그램 조금씩 올려놓겠다' '원전 파괴전야 깜깜한 청와대 어쩔까'라는 내용이었다. 이 블로거는 앞선 9일 한수원 직원 e메일에 대한 해킹 시도도 자신이 했다고 주장했다. '공격 침묵 한수원, 왜 그럴까. 메일 차단한다고 원전 폭발 꽤 막아낼까요?'라는 글을 통해서다.

　이틀 뒤인 17일 예고대로 유출 자료가 공개되기 시작됐다. 블로거는 한수원 전·현직 직원 1만799명의 개인정보 파일을 올린 데 이어 18일 ▶월성 1·2호기 제어프로그램 해설서 ▶월성 1호기 감속재계통 도면 ▶월성 1호기 패널 사진 ▶고리 1·2호기 배관계측도면 등을 공개했다.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 한국 후쿠시마 청와대에 줄까 말까'라며 2차 공격이나 공개도 예고했다.

　그런데도 한수원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원전 도면이 유출된 18일에야 네이버에 블로그 폐쇄를 요청했다. 한수원 측은 애초 "이 블로그를 모니터링했지만 개인 블로거의 확인되지 않은 행동에 일일이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가 이후 "해당 블로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말을 바꿨다. 이에 대해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알고도 대처 안 했거나, 몰랐거나 어느 쪽이든 한수원의 보안대책이 부족하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문건 유출을 보는 산업부와 한수원의 인식이 지나치게 안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산업부는 이날 한수원 보고를 토대로 한 보도설명 자료를 통해 "제어프로그램·계통도면·배관설치도는 운전·정비용 교육 자료이고 패널 사진은 인터넷에 다수 게시된 사진"이라며 "자료 유출에 따른 영향은 미미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원자로를 둘러싼 감속재와 배관은 국가기밀로 취급되는 설계도면"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산업부와 한수원이 이번 유출이 대단한 게 아닌 것처럼 여긴다면 국민 안전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합동수사단 수사 착수=한수원의 수사 의뢰에 따라 서울중앙지검은 개인정보범죄 정부 합동수사단(단장 이정수 첨단범죄수사2부장)에 이 사건을 배당하고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자칭 '원전반대그룹'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주장해 국민적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만큼 대검 사이버수사단을 포함한 첨단범죄 수사인력을 대거 투입하기로 했다. 함께 수사 의뢰를 받은 경찰청 사이버수사대도 지휘해 검경이 공조 수사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자료 유출이 해외 서버를 우회한 복잡한 해킹 범죄인 경우 정확한 유출경로를 확인하기까지 최대 몇 주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한다. 합수단 관계자는 "2009년 직원 교육용 자료가 빠져나갔다는 점에서 외부 악성코드나 바이러스에 의한 해킹 외에 내부 직원 범행일 수도 있다"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정효식 기자, 세종=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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