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권력보다 재벌 수사가 더 어렵다"

엄민우·조해수 기자 2014. 11. 2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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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권력'보다 살아 있는 '재벌'에 대한 수사가 더 어렵다." 대표적인 특수통 검사로 알려진 남기춘 전 서울서부지검장이 현직 시절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이다. 그의 이 한마디는 재벌 수사에 대한 검찰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재벌 관련 검찰 수사는 늘 두 가지 논란에 휩싸인다. '봐주기 수사' 혹은 '기획 수사' 의혹이다. 일선에서 밤새 고생하며 수사하는 검사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겠지만, 끊임없이 이 같은 말이 나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만큼 재벌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일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재벌에 대한 감시를 해온 시민단체 인사들은 이런 현실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는 재벌을 검찰에 고발할 때 "고발인 조사를 2~3시간 정도 하면 수사 의지가 없는 것이고, 하루 종일 하면 의지가 있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분야 '선수'들은 이미 고발인 조사를 할 때부터 검찰의 수사 의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명박 정권과 현 정권에 걸쳐 두 차례 이석채 전 KT 회장에 대해 고발 건을 진행하며 조사를 받은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의 말이다.

"2012년 이석채 회장에 대한 고발인 조사를 받을 때는 검사는 보이지도 않고 수사계장이 문답 정도만 하고 말았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2013년에 조사를 받을 때는 직접 검사가 나와 적극적으로 세세하게 조사를 했다. 한창 이석채 회장이 '버티기'를 하고 있다는 논란이 일어났을 시기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말 검찰 조사를 받던 당시 "현 정권의 찍어내기 수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러분이 더 잘 아시지 않느냐"라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당시 검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에 대해 법원은 "검찰의 주요 범죄 혐의에 대한 소명이 부족해 구속의 사유와 정당성이 부족하다"며 기각했다. 이 때문에 또 한 번 '무리한 수사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검찰의 봐주기 수사 의혹이 나오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시사저널 취재진은 그중에서도 특히 금융감독원·국세청 등 외부 사정기관에서 고발하거나 의뢰한 사건 중 봐주기 수사 의혹이 제기됐던 건들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봤다. 전문성을 가진 기관의 사전 조사로 고발이 이뤄졌음에도 봐주기 논란이 나오는 것들은 특히 더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취재 과정에서 외부 사정기관들의 조사 내용이 담긴 자료들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금감원이 통보한 건을 검찰이 내사 종결했던 한 사건의 내막에 대해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해당 사건은 골드만삭스의 홍콩법인 영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왼쪽부터) ⓒ 시사저널 구윤성·연합뉴스

골드만삭스 건 의혹, 검찰 '무혐의' 내사 종결

지난해 11월 금감원은 '골드만삭스 홍콩법인이 국내 금융 당국의 인가 없이 국내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다'는 내용을 검찰에 통보했다. 해당 사건에 대한 내사는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에서 진행했다. 골드만삭스 홍콩법인과 거기에 소속된 임직원 3명이 내사 대상이었다. 검찰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모두 5개월간, 국내 투자기관 담당자와 골드만삭스 서울지점 관계자, JP모건 담당자 등을 직접 소환조사했다. 해당 수사의 핵심은 골드만삭스 홍콩법인이 서울지점을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중개 행위를 했는지 여부였다. 만약 그렇게 했을 경우 자본시장법 7조 6항 등에 위반되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은 지난 4월30일 이들에 대해 '무혐의' 의견으로 내사 종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골드만삭스 서울지점 관계자가 상품 설명 정도만을 한 사실이 확인돼 홍콩법인이 직접 중개 행위를 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결론이었다.

이 건은 같은 사안에 대해 검찰과 금감원이 온도차를 보인 대표적 사건이다. 검찰은 당시 "형사처벌은 행정 제재에 비해 더욱 엄격한 증명과 법률적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으로 금감원 징계와 모순된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금감원은 홍콩법인이 상품을 판매한 16군데 기관투자가들 중 위반 가능성이 큰 5개를 나름대로 추려 통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결과적으로 금감원만 머쓱한 꼴이 됐다. 급기야 검찰의 내사 종결 결정이 나온 후 금감원의 징계 명분이 사라지자 골드만삭스 서울지점은 오히려 금감원을 향해 징계 조치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결정과 금감원 등 외부 사정기관의 결정이 언제나 궤를 같이할 수는 없다. 또 수사권 및 기소권은 검찰에 있기 때문에 검찰의 결정이 당초 지적 내용과 다르다고 해서 마냥 비판을 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검찰에 대해 볼멘소리가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우리로서는 자료가 나중에 검찰로 넘어갔을 때 혹시라도 제대로 검사를 안 한 것으로 판명 나 책임을 추궁당하면 회피할 수단이 없다. 괜히 봐주기를 한 것처럼 오해를 받기 싫어서라도 깐깐하게 파헤친다. 반면 검찰은 여러 가지 자기방어 능력을 갖고 있고 외부의 견제를 덜 받는다"고 토로했다.

동양그룹 CP 발행 사건 봐주기 논란

국세청이나 금감원 같은 사정기관들이 고발한 사건이 봐주기 수사 의혹에 휘말리는 건 골드만삭스 경우만이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돈 기업인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 비리 사건에 대한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의 수사는 '봐주기 수사'와 '기획 수사'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지난 9월 조 회장은 1505억원 상당의 조세를 포탈하고 중국법인 자금 698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국세청으로부터 검찰에 고발됐다. 검찰은 조 회장 등 5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조 회장은 2010년에도 계열사 누락 신고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고발된 적이 있으나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정권이 바뀌고 전 정권의 사돈 기업에 대한 수사가 재개된 것을 두고 표적수사 의혹이 쏟아졌다.

해당 수사는 봐주기 의혹까지 낳았다. 조 회장은 정밀 건강진단을 이유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당시 조 회장에게는 출국금지가 내려져 있었는데, 검찰이 수사를 앞두고 이를 해제해준 것에 대해 봐주기 논란이 일었다. 검찰은 "치료 필요성이 인정돼 출국금지를 해제한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또 비자금이 정·관계 로비에 쓰였는지 여부에 대해선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지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에 수사 대상이 아니었다"는 이유였다.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이 연루된 동양그룹 CP 발행 사기 사건 또한 봐주기 논란을 낳았다. 금감원 및 개인투자자들의 고소·고발로 이뤄진 해당 수사에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현재현 전 회장 등 11명을 기소했다. 모두 3개월에 걸쳐 수사했지만, 초미의 관심사였던 정·관계 로비 여부 등은 밝혀내지 못했다. 당시엔 청와대 및 산업은행 등이 '동양그룹 봐주기 대책'을 논의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나올 때여서 비자금 로비 여부에 관심이 모아졌던 게 사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국세청의 봐주기 여부에 대해서도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또 실질적 공범으로 지목된 현 전 회장의 부인 이혜경씨에 대해선 아무런 처분이 내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일각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동양 사태를 계속 추적해온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가족을 한 번에 구속시키는 것이 우리 정서상 부담될 수 있지만, 모친과 함께 구속 기소된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동양그룹 CP 사건의 경우 수사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된 축에 속한다. "국민의 공분을 사는 사건의 경우엔 그나마 수사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건은 수사 진행 자체가 더디다"는 게 김 대표의 지적이다.

또 다른 CP 관련 사건인 '웅진그룹 CP' 건과 관련해서도 검찰은 '봐주기 의혹'을 받았다. 지난해 5월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1198억원 CP 발행 사기 및 웅진그룹 계열사 부당 지원 관련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고발 주체는 금융위 소속 증권선물위원회였다. 당시 검찰은 피의자 전원을 불구속 기소했는데 피해 액수가 큰 건에 대해 불구속 수사한 것을 놓고 뒷말이 무성했다. 검찰은 웅진 계열사 매각이 진행 중이라 불구속 수사하는 것이 채권자들 피해 회복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10월 검찰 수사관들이 효성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검찰 스스로 불신 쌓는 안타까운 형국"

주요한 범죄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오랜 기간 묵히는 경우도 있다. 검찰은 신세계 총수 일가 계좌에 30억원 상당이 입금된 사실을 확인하고도 9개월 동안 내사만 진행한 사실이 본지 보도로 밝혀지기도 했다(본지 11월13일자 '신세계 총수 일가 계좌로 30억 흘러들어갔다' 기사 참조).

재벌 수사와 관련해 계속되는 논란은 사법 정의 자체를 흔드는 풍조를 낳고 있다. 검찰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도 재벌 수사에 대해 일관된 원칙 확립이 급선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재계 비리가 발생한 경우 검찰이 나서 '잘못을 저지르면 집안은 망해도 회사는 산다'는 교훈을 줘야 하는데, 오히려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 기회를 박탈하고 검찰도 스스로 불신을 쌓는 안타까운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엄민우·조해수 기자 / mw@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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