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아내는 남편에게 어떤 존재인가?

홍정표 2014. 11. 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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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전 새벽.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천안 나들목을 얼마 지나지 않은 지점에서 승합차가 8톤 화물차를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승합차 조수석에 타고 있던 캄보디아 출신 결혼 이주 여성 25살 이 모 씨가 숨졌다. 당시 이 씨는 임신 7개월, 뱃속의 태아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운전자인 남편 45살 이 모 씨는 가벼운 부상에 그쳤다.

고속도로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고, 하지만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교통사고 조사반의 예리한 직감은 적중했고, 강력팀에 배당된 뒤 밝혀진 사건의 전모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 조수석에 치우친 파손 부위

임신 7개월의 아내는 사고 현장에서 숨졌다. 고속도로 추돌사고인 데다, 안전벨트 조차 하지 않았던 것. 남편은 경찰 조사에서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추돌 부위가 유난히 조수석에 치우쳐 있었던 것이 결정적 단서로 작용한다. 숨진 아내와 달리 운전석에 있던 남편 이 모 씨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부상을 입었고, 운전석도 거의 망가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사진 1>추돌사고 현장 사진(제공: 천안 동남경찰서)

■ 혈흔에서 나온 '수면유도제'

수 만 가지 교통사고를 처리한 배테랑 경찰관은 여기서 진가를 발휘한다. 현장에서 나온 아내의 혈흔을 채취해 국과수에 성분 분석을 의뢰하고, 강력팀에도 수사를 요청했다. 국과수 성분 분석을 통해 아내의 혈흔에서는 수면유도제 성분이 검출됐다. 경찰 조사에서 남편은 아내가 감기약을 먹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임신 7개월의 임부가 한여름에 감기약을 복용했을까? 아무리 결혼이주여성이라고 해도 임신중 약물 섭취의 위험성은 알고 있을텐데...하지만 혈흔에서 나온 약 성분은 수면유도제가 유일하다고 한다. 감기약이나 다른 약물을 복용했더라면 결과 또한 달랐을 것이다. 여기에 경찰 수사는 탄력을 받게 된다.

■ 아내 명의의 보험 26개, 사망 보험금이 95억 원

남편을 의심한 경찰은 즉시 사망자 명의로 된 보험을 조회하게 된다. 놀랍게도 숨진 이주 여성 앞으로 든 보험만 26개. 사망시 남편 이 씨가 수령하게 될 사망보험금은 무려 95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통 사람은 서 너 개도 많다고 하는 보험에 26개나 가입하다니!

매달 숨진 아내 앞으로 들어가는 보험료만 360만 원에 이르렀다. 건강 염려증이나 미래 불안증이 있다고 해도 이 정도 규모의 보험 가입은 분명 비정상적이다. 여기에 보험료를 감당하기 힘든 이 씨는 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돌려막기 식으로 보험금을 지불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험사에서 빌린 돈만 3억 원 가량. 생활용품 가게를 운영하는 남편 이 씨는 단골손님인 보험 외판원들의 권유를 못이겨 보험에 가입했을 뿐이라고 경찰에 주장했다고 한다.

■ 결정적 증거, CCTV와 시뮬레이션

졸음운전을 했을 뿐이라는 남편의 주장은 경찰과 국과수, 도로공사, 도로교통공단과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통한 시뮬레이션 작업을 거치면서 결정적으로 힘을 잃는다.사고 당시 장면이 담긴 고속도로 CCTV 화면을 분석해보면, 이 씨의 승합차는 사고 지점을 400여 미터 앞두고 갑자기 상향등을 켜더니 속도가 붙는다. 그리고 충돌 직전에 갑자기 운행 방향이 두 차례 바뀌는 것이 전조등 불빛의 미세한 변화로 목격된다. 분석에 나선 전문가들은 이것이 의도적인 핸들 조작의 유력한 증거라고 판단했다. 특히 현장 검증 등을 통해 시뮬레이션을 해봤더니, 만약 이 씨의 주장대로 졸음운전을 했다면 승합차는 화물차 뒷면이 아니라 오른쪽 가드레일과 충격하는 궤적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사고현장 직전에 있는 굽은길을 돌 때 안정적인 운행을 한 것도 당시 졸음운전을 했다는 남편의 주장을 반박하는 이유가 됐다.

<사진 2>사고 현장 시뮬레이션 결과지.ⓐ는 승합차 핸들이 움직인 지점, ⓑ는 정상 운행 상태(제공: 도로교통공단 대전.충남지부)

■ 선견지명? 의도적 준비?

경찰 조사 도중 아내를 잃은 슬픔이 너무 크다며 눈물을 보였다는 남편 이 씨. 그런데 경찰이 압수해 복구한 휴대전화 메모리에는 경상을 입은 이씨가 환자복을 입은채 두 팔을 들고 미소를 띄운 사진까지 나왔다고 한다. 석 달에 걸친 경찰의 수사는 남편 이 씨의 평소 행적까지 낱낱이 파헤쳤다. 자주 고속도로를 이용한 덕분에 CCTV에 잡힌 적이 많았는데, 놀랍게도 남편은 평소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고 당일에는 안전벨트를 하고 있어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하니, 선명지견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준비였을까?

■ 보험가입 제도 개선 절실

이역만리 낯선 땅으로 시집와 두 아이의 엄마로 자리를 잡아가던 25살 이 모 씨의 청춘은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임신한 무거운 몸으로 남편의 장거리 출장을 따라 다니는 것도 마다않으며 가정에 일조하려던 살뜰한 아내는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남편 이 씨는 숨진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고, 둘은 20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다. 낯설지 않은 다문화가정의 모습이다. 수년 전에도 보험금을 노리고 외국인 아내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화재 현장에서 질식해 숨지게 한 남편이, 1년여 만에 경찰에 구속돼 세간이 떠들썩한 일이 있었다. 이번 사건과 놀랍게도 닮은 꼴이다. 사건 브리핑에서 경찰은 거액의 보험금을 노린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실정을 감안해 각 보험사간 가입정보에 대한 공유 등 제도개선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 진실은 가려져야 한다

남편에게 아내는, 또 아내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였을까? 자신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뱃 속에 둘째를 품은 아내는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다. 경찰 수사 내용대로라면 정말 '남'보다 못한 '남편'이지 않은가?

남편 이 씨의 강력한 혐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그 동안 수집한 증거들을 토대로 이 씨를 살인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진실게임으로 번진 사건의 진상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부디 진실이 가려지길 바라며,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엄마와 태아의 명복을 빈다.

☞ 바로가기 <뉴스9> "95억 보험금 노리고 '사고 위장' 임신 아내 살해"

홍정표기자 (real-eye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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