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이후의 가구시장’ 중소 가구업체부터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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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소비자들이 직접 조립 나서면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로 버텨온 영세공장들 큰 위기

“하루 꼬박 일해서 가구를 만들고 나면 뿌듯하긴 한데, 휴일이 다 가버려 허탈하기도 하고…. 기분이 복잡해요.”

초등학생 자녀를 둔 직장인 안성훈씨(40)는 보름 전 자녀 방 가구를 바꿔줬다. 새로 산 아동용 침대와 옷장은 이케아 제품이다. 아직 한국 매장이 정식 개점하지 않은 상태라 해외 매장 상품을 구매대행해주는 업체를 이용했다. 아내와 딸이 며칠 동안 컴퓨터 모니터를 붙들고 고른 모델이었다. “그냥 가구골목 가서 골라보자고 했는데 가서는 얼마 둘러보지도 않고 이케아 걸로 사겠대요. 그런데 다른 가구처럼 주문만 하면 되나? 내가 조립을 해야 되는데.”

안씨는 미국 유학 시절 책상과 의자, 서랍장 등 몇 종류의 이케아 가구를 조립한 경험이 있어 조립이 전혀 낯설진 않았다. 하지만 느낌은 그때와 좀 달랐다. “돈 아껴가며 공부할 당시엔 싸기도 하고, 공부 마치고 한국 올 때 버려도 아깝지 않으니 시간 들여 가구를 조립하는 수밖에 없었는데요. 지금은 꼭 그럴 필요가 있나 싶더라고요.” 안씨가 가구 2개를 만드는 데 들인 시간은 중간중간 쉬는 시간을 빼고 일한 시간만 도합 6시간이 걸렸다.

안씨가 들인 이 6시간은 세계적 가구기업 이케아의 한국 시장에서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적인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은 무급노동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다. 직장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시간은 긴 데 비해 집안에서 직접 가사노동을 처리할 여유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시간은 부족하고 임금은 싼 현실 때문에 가구 조립을 직접 하는 대신 완제품을 사서 쓰거나 사람을 불러 맡기는 것이 경제적이다.

조립과정에 들어가는 노력의 가치는
게다가 한국의 주거환경 특성상 조립식 가구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이케아와 같은 조립식 가구를 사서 한 번 조립을 시작하면 그날 안에 끝내야 한다. 따로 작업장을 갖출 형편이 아니라면 좁은 집에 조립이 덜 끝난 가구와 자재를 늘어놓을 만한 공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압축적으로 단시간에 일해야 하는 상황은 소비자에게 부담을 안겨준다. 대부분의 이케아 가구는 드라이버와 망치 등 간단한 가정용 연장만 있으면 조립할 수 있다.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조립설명서를 잘못 이해한 소비자가 전혀 엉뚱한 모양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적지 않다. 게다가 이케아 제품의 단점으로 늘 거론되는 내구성 불량 문제도 조립과정에서의 실수가 이유인 경우가 많다.

한국과 생활문화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일본에서 이케아가 초기 고전했던 사례 역시 이케아가 부진할 수 있다는 전망에서 제시되는 근거 중 하나다. 1977년 일본에 처음으로 진출한 이후 1986년 철수할 때까지 이케아의 성적표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2006년 일본 시장에 다시 진출하면서 조립 대행 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카드를 들고 왔을 때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한국처럼 무급노동 시간이 짧고 완제품 소비성향이 강한 일본 시장 특성에 맞는 대책을 내놓으면서 가구업계 판도를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역시 2005년 영국의 세계적인 DIY (Do It Yourself·스스로 만드는 제품) 업체 비앤큐(B&Q)가 한국 시장에 야심차게 진출한 지 2년 만에 철수한 바 있다. 당시 비앤큐는 서울 시내 대형마트 지하에 대규모 매장을 내고 이케아와 유사하게 가구·조명 등 홈인테리어 제품 전반을 한번에 쇼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개점을 앞둔 이케아 광명점의 경우 세계 최대 매장(연면적 13만1550㎡)을 돌면서 창고에서 직접 물건을 가져와서 계산한 뒤 배송과 조립까지 손수 해야 한다. 조립 대행 서비스도 시행할 예정이지만 대행과정에서 기본 6만9000원이 들어가는 데다 품목에 따라 추가요금이 든다. 해외 매장의 조립 대행 서비스 요금 수준으로 미뤄 짐작하면 제품가격의 약 20~25%를 추가로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이케아가 한국 시장에서 단순히 가격만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제품 자체의 가격만 따졌을 때 이케아 제품은 집성목과 고급 중밀도섬유판(MDF) 소재를 혼용한 국내산 완제품 가구 가격과 비슷하게 중저가 수준이다. 하지만 가구업계 관계자들을 비롯해 시장조사 전문가들까지 이케아의 한국 진출 이후 가구업계에 적잖은 변동이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아 지적한다. 한국의 가구업계는 그나마 가격으로만 경쟁이 가능할 뿐 디자인·브랜드 등 나머지 영역에서는 이케아와 경쟁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조립 대행 포함 땐 가격경쟁력 높지 않아
이케아 한국 매장에 들어올 품목의 가짓수는 약 8000개에 달한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북유럽식 디자인’ 외에도 다양한 스타일의 가구와 소품을 소비자의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것이다. 이케아가 들여오는 것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말도 나온다. 중저가의 가구를 필요할 때마다 쉽게 교체하는 ‘이케아식’ 소비행태가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업계 브랜드 전문가인 김도환 큐앤컴퍼니 대표는 “매장 내 식품매장은 물론 대형마트와 연결돼 생필품 구매까지 한번에 가능한 체계는 국내 업체로선 손댈 수 없는 수준”이라며 “한국의 젊은층에서 이케아의 브랜드 선호도가 높은 데 비해 가격은 저항 없이 받아들일 정도라서 장기적으로도 시장점유율을 늘려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한국 시장에서 이케아의 성패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이케아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여파는 중소 가구공장부터 맞닥뜨릴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유일한 무기인 가격으로 승부하기 위해 국내 대형 가구업체들이 제품을 납품하는 중소 가구공장에 대한 납품가 압박을 늘릴 것이기 때문이다.

중·대형 가구업체에 OEM 방식으로 가구 완성품을 납품하는 소형 가구공장의 대표 한모씨는 조립까지 끝난 완제품 가구의 납품가는 이미 낮을 대로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대리점이나 백화점에서 팔리는 가구 가격의 3분의 1이 마진이라면 말 다한 거지. 그러니까 큰 회사들은 이케아 들어와서 힘들어도 아예 망할 정도는 아니라고. 문제는 우리(소형 가구공장)야. 좀 지나면 경쟁이 안 된다고 (대형 업체가) 납품가격 낮출 텐데 그럼 못 버텨.” 지금의 가구공장도 한국인 노동자 대신 외국인 노동자들을 써서 겨우 가격대를 맞추는 형편이다. 한씨는 이케아 한국 진출 이후 거래규모까지 줄어들면 망하는 건 시간문제라며 불안해 했다.

‘이케아 이후의 가구시장’에 대해 한 가구업체 관계자가 내놓은 전망은 어둡다. 소비자가 자신의 노동가치마저도 ‘덤핑’해야 하는 시장이 온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가구를 조립하겠다고 나서는 소비자들이 없었던 거죠. 가구공장에서 싼 값에 조립을 해준 셈이니까. 이제는 소비자들이 싼 값에 조립하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그럼 앞으로는 공장에서 가구 만들겠다고 하는 직원들이 없어지겠죠. 이미 월급은 너무 적은데 거기서 더 떨어질 테니까.”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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