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악플 피해 웬만하면 대량고소..경찰은 '난감'

박홍두 기자 입력 2014. 10. 20. 03:32 수정 2014. 10. 20. 05:1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올해 피고소 10명 이상 사건만 96건경찰은 "어떻게 전국에 퍼져있는 피고소인 찾아다니나" 난감

지난 8월 종교인 ㄱ씨가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자신과 동료 종교인들이 도박을 했다는 언론의 의혹보도에 악성 댓글(일명 악플)을 단 누리꾼들을 고소하는 내용이었다. ㄱ씨는 댓글들을 손수 모아 증거자료로 첨부했다. 그런데 피고소인 명단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소한 사람만 무려 1400여명에 달했다. 그는 사람 이름을 명시한 것이 아니라 글을 올린 계정 이름(ID)을 하나하나 적어 제출했다.

지난 4월엔 '사법연수원 불륜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돼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ㄴ씨(29)와 그의 아버지가 인터넷상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악플을 단 누리꾼 수십명을 고소했다. 이 사건은 연수원 동기인 ㄴ씨와 ㄷ씨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면서 둘의 관계를 알게 된 ㄷ씨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논란이 됐다. ㄴ씨는 ㄷ씨가 기혼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악성 댓글이 쏟아졌다.

배우 송윤아씨도 지난 3월 배우 설경구씨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악성 댓글을 올린 누리꾼 50여명을 고소했다.

인터넷상 악플을 단 사람들을 무더기 형사고소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예년과 달리 올해는 악플을 단 ID 전부를 고소하는 '대량 고소'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은 올해 1월부터 9월26일 현재까지 '피고소인 10명 이상 명예훼손·모욕 고소 접수' 건수가 96건이라고 밝혔다. 피고소인이 10~49명인 경우는 61건, 50~99명은 15건, 100~999명은 19건, 1000명 이상은 1건이다.

대량고소 경향은 올해부터 강해졌다고 한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이런 대량고소가 거의 없었다"며 "악플이 난무하다보니까 더 이상 이를 용인하지 않고 무조건 고소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같은 대량 고소 때문에 경찰 수사가 난항에 빠진 모습이다. 일선 경찰들은 이례적인 무더기 고소 때문에 업무가 마비되기 직전이라고 난감함을 표하고 있다. 한 경찰관은 "ID로 된 피고소인을 조사해야 하는데 그 수도 많은데다 대부분 전국에 퍼져 살고 있어 물리적으로 소환조사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렇다보니 일부 경찰들은 경찰관서별로 서로 사건을 떠미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경찰서별로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경찰청 훈령인 '사건관할규칙' 6조에 '사이버사건 중 접수단계에서 범죄지·피고소인 주소지 등 형사소송법상 토지관할 근거자료가 미흡한 경우(예를들면 ID나 닉네임으로 고소하는 경우) 사건을 접수한 경찰서에서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돼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 규칙은 올해 초부터 시행 중이다.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관계자는 "사이버범죄의 관할 혼동을 줄이기 위해 미리 시행시켰던 제도"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상은 반대인 경우가 많은 셈이다. 예를 들어 서울 종로서가 고소를 접수하긴 했지만, 피고소인이 대구에 살고 있는 경우 종로서가 대구 소재 경찰서로 사건을 이송시키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서로 미루다보니 초동수사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부터 '내 사건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치부하는 경우다.

이에 경찰청은 지난 15일 긴급히 '사이버범죄 대량 고소사건 처리지침 마련 간담회'를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개최했다. 일선 경찰관서 중 대량 고소사건 접수 경찰서 경찰관 25명이 참석해 일선의 의견을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일선 경찰관들은 "피고소인이 수십, 수백명인데 그들이 우리 관할에 모두 사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전국을 다니면서 그들을 찾거나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서울로 와서 조사 받게 하라는 얘기냐"고 읍소했다.

경찰청에서는 이처럼 사건 이송이 힘든 경우 '촉탁수사'를 할 것도 권고한 바 있다. 촉탁수사란 해당 주소지에 사는 사람에 대한 조사만 그 지역 경찰서가 한 뒤 그 결과를 처음 고소사건을 접수한 경찰서에 보내주는 일종의 분담수사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일선 경찰서 경찰들은 "피고소인이 한 두명도 아니고 각 경찰서마다 상황이 달라 촉탁을 한다해도 지지부진 잘 안된다"고 말했다.

결국 이날 간담회는 결론 없이 끝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청 관계자는 "좀 더 일선의 의견을 들어본 뒤 개선점을 강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로 새롭게 늘고 있는 대량 고소에 대해 제도는 뒤따르지 못하고 있고, 상황마저 녹록지 않아 경찰의 고민은 날로 깊어져만 가고 있다.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