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비행기의 꼬리칸

2014. 10. 2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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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탈덕열전] 프리미엄 클래스의 호사스러움 경쟁에 밀려나는 이코노미석…이코노미석 잘 만들어 칭찬받을 항공사 어디 없나

'설국열차'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빗댄 영화 속 공간만은 아니다. 지금 지구의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 대부분은 이미 설국열차이기 때문이다.

국내 양대 항공사의 장거리 일등석을 타보면 대충 이렇다. 개당 제작 비용만 2억원이 넘는 좌석에 앉으면 샴페인과 같은 음료가 나온다. 용케 내 이름을 아는 승무원이 인사를 하며 외투를 건네받는다. 순항 고도에 진입하면 좌석 앞 테이블에 하얀 식탁보가 펼쳐진다. 대한항공에서는 식전에 캐비아 한 병이 나온다. 집에 훔쳐가서 인스턴트 믹스커피라도 녹여보고픈 자개로 만든 스푼과 함께. 한라산 400m 기슭 삼나무 숲에서 천연 화산 암반수와 무항생제 사료를 먹고 자란 한우라든가, 유기농 곡물만 먹고 광활한 들판을 행복하게 질주했던 닭으로 만든 서너 가지의 메뉴 가운데 메인 요리를 고른다. 온갖 치즈와 셔벗을 후식으로 먹다보면, 디자이너 브랜드의 잠옷을 건네받을 것이다. 휴대용 편의용품(Amenity Kit)이 든 작은 가방을 열어보면 아시아나항공에는 불가리(BVLGARI) 화장품이, 대한항공에는 항덕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한 다비(DAVI)라는 브랜드 제품이 들어 있을 것이다. 탑승객 모두 똑같은 잠옷을 입고 있어 교도소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양모 이불과 푹신한 베개와 함께 잠을 청할 수 있다. 아시아나항공이 자랑하는 최신 항공기 모델을 탔다면 1등석에 달린 미닫이문도 닫고 자야 한다.

교통수단인 항공기들은 요즘 편리함보다는 호사스러움을 두고 경쟁을 시작한 듯하다. 저비용항공사(LCC)와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프리미엄 서비스로 차별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이코노미석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전세계적으로 항공사들은 대부분 프리미엄 클래스의 호사스러움을 두고 경쟁할 뿐, 이코노미석은 안중에 없다. 국내 양대 항공사 광고에도 거의 대부분 (백인이 주로 앉아 있는)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만 등장한다. 탑승객 대부분은 평생 한 번 타기 어려운 좌석들이다.

그사이 이코노미석은 '프리미엄 서비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피폐해졌다. 좌석의 쿠션은 훨씬 더 얇아져 비행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고, 좌석 간격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고유가와 비용 절감이라는 이유로 담요를 비롯한 기내서비스 물품은 모자라기 일쑤다. 특히 국내 항공사들의 이코노미석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질은 최근 10년 사이 심각하게 후퇴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기내식은 조리된 음식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공장 음식들로 점차 대체되는 추세다. 게다가 이코노미석의 기내식 신메뉴 개발은 비빔밥과 쌈밥 이후로 멈춘 것 같다. 단거리 노선은 더욱 심각하다. 이런 맥락에서 "닭장에서 사료 먹는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닐 것이다. 수하물 규정도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물론 딱 한 가지 좋아진 것은 있다. 이코노미석에서 전반적으로 다 후져졌는데 '엔터테인먼트' 기능만 나아진 것. 모든 건 피폐해지고 엔터테인먼트만 좋아지는 것, 그것은 진짜 설국열차의 시대 아닐까.

일반적으로 항공사들은 프리미엄 클래스를 통해 수익을 낸다지만, 반대로 이코노미석이 없다면 항공사가 유지될 수 없다.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불황을 더 많이 타는 프리미엄 클래스의 수익이 꽤나 저조하다는 평이다. 기업들은 출장에 비즈니스석을 주지 않고, '진짜 부자'들은 전용기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전세계를 통틀어 프리미엄 좌석만 운항해서 수익을 최대화해보겠다던 항공사는 예외 없이 망했다. 호사스러운 프리미엄 클래스 대신, 대부분의 승객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이동하는 걸 더 시도해보고 상상할 수는 없을까. 기업주가 이코노미를 탈 일이 없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걸까. 분명한 건 이코노미석으로 칭찬받는 항공사가 거의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항공사에는 이 틈새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규호 미국 일리노이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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