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인 대탈출 25년..당시 동·서독엔 채널이 있었다

2014. 10. 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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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 1989년 10월 1일 서독 남부 바이에른주 호프역 광장의 시계는 새벽 6시 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시각 동독인 1천200명을 태운 첫 번째 특별 열차가 8번 플랫폼에 도착하면서 격동의 독일 통일 역사는 다시 일보 전진한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5년 전 서독 망명을 요구하는 동독인들의 대탈출은 그렇게 시작됐다.

동·서독 하나 됨의 과정은 요술 램프의 마법처럼 그냥 닥친 게 아니었다. 서로 열어둔 채널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당시 서독의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과 동독의 오스카 피셔 외무장관의 9월 27일 저녁은 특별한 것이었다.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에 머물던 겐셔 장관은 피셔 장관에게 서독 망명을 요청한 탈동독민들에게 여권과 비자를 줘 '출국' 시키든지, 아니면 열차로 동독 땅을 거쳐 보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제안을 한다.

피셔 장관은 이튿날 본국에 뜻을 전달하기로 했고, 겐셔 장관은 이와 별개로 야로미르 요하네스 체코 외무장관의 도움을 요청하고 나섰다.

요청 내용은 동독인들의 서독행 측면 지원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해 5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철조망 일부가 제거되면서 촉발된 동독인들의 서독 망명 매개는 동베를린 주재 서독 상주대표부, 헝가리·체코·폴란드 주재 서독대사관 같은 것이었다. 동독인들은 대사관 담장을 넘어들어와 서독행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헝가리에서 휴가를 보내던 15만∼20만명의 동독인 가운데 10% 정도가 망명을 원하고 있었고, 헝가리 정부는 서독의 경제지원을 대가로 이들의 집단출국을 돕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면 하나가 겐셔 장관의 체코 주재 서독대사관 발코니 발표다. 그는 9월 30일 저녁 6시58분 발코니에 올라 '뉴스'를 전하기 시작한다. 대사관을 가득 메운 4천여 동독인들의 서독행 이슈를 두고 동독 및 관계 당사국들과 협상한 결과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의 발표는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의 출국이 허가됐음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는 문장에서 멈춘다. '출국'이라는 단어를 들은 망명 요청자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오면서 이어질 내용이 다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겐셔 장관은 최근 프라하를 찾아가 그 역사적 현장의 흔적을 더듬으며 25년 전 감회에 젖었다. 그러면서 그날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사건이라고도 회고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진다. 마침 그날 친구들과 사우나를 즐기다 이 소식을 듣고 거리를 배회하며 정치 입문을 결심한 동독 출신의 물리학 박사 앙겔라 메르켈은 지금 통일독일의 3선 총리다.

25년이 지난 지금, 독일은 동독인들의 서독행 러시가 아니라 유럽 빈국 난민들의 폭풍 유입을 또 다른 숙제로 받았다. 올해에만 20만 난민이 유입될 것으로 보는 독일 사회는 최근 벌어진 난민수용소 인권유린사건을 계기로 숙제 해결 노력에 한층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un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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