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문제는 세금이다]5년간 2222개 조항 바뀐 어려운 세법.. 개인 스스로 신고 불가능

박병률 기자 입력 2014. 9. 21. 22:18 수정 2014. 9. 2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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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들만의 세법

유명어학원 강사인 ㄱ씨는 대학과 기업체에 출강해 매월 400만원을 번다. 통상 강의료를 받을 때는 소득세와 지방소득세 등 3.3%가 원천징수된다. 이 때문에 ㄱ씨는 자신의 소득에 대한 세금이 모두 납부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듬해 국세청은 연수입 4800만원을 성실하게 신고하지 않았다며 추가납부 226만원과 가산세 98만원 등 324만원을 부과했다. 학원강사, 외판원, 작가, 배우, 채권회수수당 등을 받는 사람은 다른 소득과 합산해 종합소득세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탓이다.

▲ 공제·감면 항목 모호, 부가세는 자의적 해석 여지 많아복잡한 세법 때문에 세금내는 데 돈·시간 추가로 들어영세 자영업자에 피해 몰려… 정부 '단순화' 의지 약해

복잡한 세법을 잘 몰라 뒤늦게 추가세금과 가산세까지 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규정이지만 해석에 따라 납부해야 하는 세금규모도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세법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세법은 너무 어렵고 자주 바뀐다. 세법관련 교수들과 세무사들은 세법을 '걸레법'이라고 부른다. 하도 자주 바뀌어 누더기가 된 법이라는 비아냥이 포함돼 있다.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이 기획재정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2007~2011년 5년간 바뀐 세법 조항은 무려 2222개다. 연평균 444개가 바뀌었다. 통상 개정된 세법은 2월에 시행되지만 6개월 뒤인 7~8월 새 세법개정안이 발표된다. 법전에 잉크가 마르기 전에 또 개정안이 나오는 셈이다. 9~10월에 바뀌는 세법은 세무사들도 깜빡 잊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깜박'의 대가로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이 오간다. 한 세무사는 "세법 특성상 자주 바뀌고 복잡한 것을 이해한다 치더라도 너무 어렵다는 게 문제"라며 "모호한 규정이 많고 표현도 어려워 세법교수나 세무사도 스스로 세금신고를 하라면 꺼릴 정도"라고 말했다.

세법이 이처럼 자주 바뀌는 것은 정책적 영향이 크다. 정권과 경제장관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고 그 정책을 지지하기 위해 세제가 동원되다보니 허구한 날 바뀐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현오석 경제팀 때는 비과세·감면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세법이 바뀌었다가 최경환 경제팀이 들어서면서 비과세·감면이 오히려 늘어났다. 심지어 '기업소득환류세제'처럼 새로운 세법이 생겨나기도 했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진 세법 때문에 개인이 종합소득세를 신고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세무 관련 쪽에서 일하는 김진영씨(44)는 지난해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6300만원의 근로소득 외 1400만원의 추가소득이 생겨 종합소득세 신고 대상자가 된 그는 국세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직접 납부신고를 하기로 했다. 참고자료는 국세청으로부터 우편으로 받은 한 장짜리 설명서가 전부였다. 3시간 동안 씨름한 끝에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결정받은 세금은 147만원(지방세 포함). 재검을 했더니 121만원이 나왔다. 자신이 한 것을 믿을 수가 없어 세무서를 직접 찾았더니 세무서 측에서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이 세금신고를 도와줬다. 이렇게 해서 나온 최종 세금은 47만원. 김씨는 "공제항목에서 내가 뭔가 빠뜨렸던 모양인데 뭐가 빠졌던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며 "그렇다고 1400만원 추가소득 때문에 세무사를 고용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납세자연맹에 따르면 소득공제와 세액공제 감면 항목만 31개에 달한다. 개념도 아리송하다. 배우자나 부양가족 공제의 기본이 되는 '소득금액 100만원'을 실소득기준으로 보면 근로소득은 500만원쯤 된다. 상가임대수입은 160만원, 학원강사와 공인중개사는 260만원, 학습지교사 보험모집인은 440만원, 영업용택시기사와 분식점은 1000만원, 구멍가게는 1300만원 내외다. 이처럼 실제 수입 간 격차가 큰 것은 수입에 비용을 빼야 하는 비율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부가치세는 법조문이 몇 개 없어 더 어렵다. 기재부와 국세청의 유권해석을 받아도 담당자마다 다르게 해석할 정도다. 법인소속의 한 세무사는 "서울, 부산 등 지역 간에도 세무서 직원의 업무처리 스타일에 따라 유권해석이 달라지는 경우를 봤다"며 "그만큼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증빙서류·장부작성, 신고서 작성 등 세금을 내는 과정에서 납세자가 부담하는 경제적·시간적 비용을 의미하는 '납세협력비용'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국세청 자료를 보면 2007년 7조6000억원이었던 납세협력비용은 2011년 9조8878억원으로 늘었다. 1개 업체당 비용도 2007년 165만원에서 182만원으로 늘어났다. 업종별 납세협력비용은 제조업이 542만원으로 가장 높다. 원가계산 등 회계처리가 상대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렵고 복잡한 세법의 피해가 대기업보다는 영세자영업자에 몰린다는 점이다. 상시 종업원 300인 이상 기업은 매출액 1만원당 납세협력비용이 1.1원이지만 상시종업원이 없는 기업은 70.7원에 달한다. 정부도 소득공제 신고 간소화, 원천세 전자신고 확대 등으로 꾸준히 납세협력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거북이 걸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세청은 "외국도 어렵다"고 반박하지만 세법 어렵기로는 한국이 단연 으뜸이다. 한국경제연구원 자료를 보면 납세에 들어가는 시간이 한국은 280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40시간의 두 배 정도 높다. 비교대상 28개국 중 9번째다. 복잡하고 어려운 세금 때문에 세금을 내는 데 돈과 시간이 추가로 든다는 얘기다. 복잡한 법인세는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으로도 지적된다.

세금이 어렵다보니 조세불복 사례도 늘고 있다. 2009년 3441건이던 소송건수(전년 이월포함)는 2013년 3772건, 2013년 4129건 등 매년 늘어나고 있다.

국세청이 국내 기업과 개인이 한 해 동안 벌고 쓴 '빅 데이터'를 고스란히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의 세법단순화 의지가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법이 아무리 어려워도 프로그램만 갖추면 세금납부를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기용 인천대 교수는 "국세청이 모든 자료를 다 갖고 있는 상황에서 세금납부자가 직접 신고를 하도록 하는 것은 '네가 잘 신고하는지 보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며 "세법은 예측가능하도록 운영해야 하고, 세금납부는 최대한 간단하게 해야 조세정책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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