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VS혁신가, 이케아 창립자의 두얼굴

이지은 2014. 9. 2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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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가구공룡' 이케아의 국내 진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오는 12월께 광명점을 열고 국내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처음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저렴함을 가장 큰 무기로 내세우는 이케아는 국내 가구시장에도 큰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케아의 핵심 경쟁력인 '최저가격'은 창립자인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의 철학에서 비롯됐다. 소문난 구두쇠인 그는 비용을 절감해 가격을 최저 수준으로 낮추는 이케아의 기업문화를 만든 장본인이다. 조립식 가구와 셀프 서비스 등의 판매전략 덕택에 이케아는 전 세계에서 37조원(지난해 기준)을 벌어들이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혁신가로서의 면모 외에 그를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나치 경력이다. 그는 10대에 스웨덴 나치 운동에 가담했다는 과거를 자서전에 언급하기도 했으며,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인생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greatest mistake of his life)'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50년만에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실수를 인정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최근 한 스웨덴 작가가 나치와 관련된 그의 새로운 면모를 들춰내며 재평가를 받고 있다. 스웨덴의 작가 아스브링크 엘리자베스(Asbrink Elisabeth)는 지난 2011년 발간한 책에서 잉바르 캄프라드가 나치에 단순히 영향받은 수준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나치 인사들의 동조자로 남아 있었다고 고발했다.

캄프라드는 나치 가담이 단순실수인 것처럼 해명했지만, 아스브링크는 그녀의 책에서 캄프라드가 나치 모임인 SSS(Sweden's Socialist Union)에서 신입 당원을 모집하는 일을 맡는 등 실수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50년 치러진 결혼식에 나치로 분류되는 극우주의자 엥그달(Per Engdahl)을 초청했으며, 2010년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그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그가 단순한 나치 추종자가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증거는 또 있다. 아스브링크는 캄프라드가 나치 활동 때문에 1943년 스웨덴 비밀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꼽히기도 했다고 밝혔다. 1943년은 이케아가 창립된 해이기도 하다.

캄프라드가 저가 혁신을 추구했지만, 무조건 '저가'만 추구하는 이케아의 문화는 언제나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은 않았다. 언스트앤영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케아는 지난 1960~1980년대 동독 정치범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 독일 내 강제노동 희생자 그룹인 UOKG의 라이너 바그너 회장은 "이케아는 1960년대부터 20년간 동독에서 정치범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이익을 얻은 기업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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