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율 OECD 2위 '골초 한국' 담배 이야기

박혜민 입력 2014. 9. 20. 02:02 수정 2014. 9. 2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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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들 일발 장전 '화랑' 32년 최장수'신탄진' 표지엔 "이디오피아 황제 만세"

"50분 훈련하고 10분 쉴 때 피우는 '화랑' 담배 한 대는 정말 꿀맛 같았지."

1970년대 군 복무를 했던 박영배(57)씨에게 '화랑' 담배는 군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이름이다.

49년 국군 창설 기념으로 나온 담배 화랑은 81년까지 무려 32년간 군부대에 저가에 공급됐던 국내 최장수 브랜드다. 쉬는 시간, 훈련 조교는 "담배 일발 장전"을 외치고 장병들은 구호에 맞춰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며 금쪽같은 휴식시간을 만끽했다. 당시 군에서는 1인당 매달 15갑을 공짜로 나눠줬다. 하지만 2008년 '디스'를 마지막으로 군 면세 담배가 사라지면서 장병들도 제값 주고 담배를 사게 됐다. 담뱃값을 4500원으로 인상하겠다는 정부안이 현실화할 경우 이등병 월급(11만2500원)으로는 담뱃값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2500원이던 담뱃값을 4500원으로 80% 인상하겠다는 정부 방안이 발표되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정부안대로라면 담뱃값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62%에서 74%로 올라간다. 하루 한 갑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연간 121만원의 세금을 내는 셈이 된다. 실질적인 서민 증세라는 비난이 일자 부총리가 나서 "담뱃값 인상은 세수 목적이 아닌 국민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나섰다. 이에 화답하듯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프랑스의 경우 2003년 담배 가격을 40% 올린 뒤 1년 뒤 판매가 33.5%나 줄었다는 연구 내용을 발표했다. 때마침 질병관리본부는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담배를 많이 피우고, 남성 흡연자 2명 중 한 명은 1년 동안 금연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5명 중 한 명은 1개월 내 금연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성인 남성의 흡연율은 지난해 기준 42.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둘째로 높다. 특히 30~40대 남성들의 흡연율은 각각 54.5%, 48.0%로 2명 중 한 명은 담배를 피운다. 사실 통계를 참고할 필요도 없다. 최근 흡연율이 낮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은 '골초 국가'다. 한국인들의 새해 결심 가운데 가장 많은 게 금연이고, '작심삼일(作心三日)'을 대표하는 것도 금연 결심이다. 하루에 국내에서 판매되는 담배는 지난해 기준으로 약 1만2000여 갑. 1년 동안 모두 884억 개비를 피워 없앴다. 10년 전인 2004년에 피웠던 담배가 총 1054억 개비였으니 그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었다.

높은 흡연율이 사회문제로 지적되기 시작한 건 90년대 들어서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흡연에 관대한 나라였다. 80년대 초까지 한국 성인 남성의 흡연율은 80%를 육박했다. 사무실이나 관공서, 식당 등 어딜 가도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지하철 플랫폼은 물론 병원이나 비행기 안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정부는 양담배는 피우지 말라고 했지만 국산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담배 끊는 사람은 '독한 놈'이라는 비난 아닌 비난을 들었다.

50년대 담배는 전장(戰場)의 긴장을 풀어주고 생사를 함께하는 벗이었다. 전쟁 가요 '전우야 잘 자라'에는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라는 구절이 있다. 그 노래에 맞춰 초등학교 여학생들은 고무줄놀이를 했다.

60년대 담배는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 재원을 마련하는 세원이었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은 담배사업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 사업에서 주력한 것도 담배공장 설립이었다. 65년 준공된 신탄진 담배공장은 동양 최대 규모에 최신식 시설을 갖췄다. 담배 자급자족과 잎담배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 세원 확보 등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잎담배 농사는 당시 어려웠던 농가의 수입원이었다. 70년 베트남 파병 5주년을 맞아 파병용사를 위로하기 위해 보낸 선물은 신탄진 담배 10만 갑이었다.

그 옛날 담배는 정부의 국정홍보 수단이기도 했다. 권오중 KT&G(옛 전매청·담배인삼공사) 대전 홍보팀장은 "신문이나 방송 같은 대중 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했던 때에 담뱃갑은 가장 쉽게 정부 소식을 알릴 수 있는 채널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16일 찾은 KT&G 신탄진 공장 역사관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담배 '승리'부터 지난해 선보인 최첨단 캡슐 담배 '에쎄 체인지'까지 수십 종이 전시돼 있었다.

60년대 나온 '신탄진' 담배 표지에는 '환영 하이레 세라세 1세 이디오피아 황제 폐하 만세 대한민국 방문' '환영 말레이시아 국왕폐하 및 왕비폐하' 등 국빈 방문 기념 문구가 쓰여 있었다. 한 담배에는 68년 9월 9일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제5대 박정희 대통령부터 13대 노태우 대통령까지 취임식에 맞춰 발매된 기념 담배 6종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금연 흐름을 한국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80년대 보건사회부가 금연 캠페인을 시작했고, 90년대에는 금연 택시나 금연 사무실이 생겨났다. 96년 국민건강증진법이 시행되면서 담배와의 전쟁은 본격화했다. 공공기관마다 금연구역을 의무적으로 설치했다. 2002년에는 하루 두 갑씩 담배를 피우던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폐암에 걸린 후 금연 전도사로 나섰다. 흡연자의 폐암 발병률이 비흡연자의 20배에 이르고, 그 외 각종 암에 걸릴 가능성도 훨씬 높다는 게 널리 회자됐다. 같은 해 KBS는 드라마에서 흡연 장면을 모두 퇴출시켰다.

정부 전망대로 흡연율이 1년 내에 30% 이상 감소할지는 알 수 없지만 담뱃값이 4500원으로 오를 경우 한국의 담배 문화에 다시 한 번 대대적인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애연가들은 후했던 담배 인심이 각박해질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다. 비싼 담뱃값을 감당하느니 이번 기회에 끊겠다는 흡연자들도 늘고 있다. 남편이나 자식의 흡연이 못마땅했던 가족들은 "4500원도 싸다, 이참에 아예 1만원 이상으로 올려 담배 생각이 안 나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기회에 한국은 '골초 국가'라는 오명을 벗게 될 수 있을까. 흡연자 단체인 '아이러브스모킹' 측은 "불법 담배나 가짜 담배가 늘어 오히려 국민 건강을 해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초와 종이를 사서 직접 말아 피우는 각련이나 전자담배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더불어 금연을 도와주는 아이디어 상품들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세계적인 금연 물결 속에서 '유해한 연기를 뿜어대는 사회악이자 의지박약의 낙오자'로 낙인찍힌 흡연자들은 이번 정부의 결정에 대해 별다른 저항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과거와는 딴판이다. 96년 국민건강증진법 시행 땐 애연가들이 모여 흡연 3권(흡연자유권, 흡연환경권,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며 서명운동을 벌였다. 2004년 정부가 담뱃값을 2000원에서 3000원으로 1000원 인상하려 하자 당시 담배 판매인과 소설가들이 대대적인 규탄집회에 나섰고, 결국 담뱃값은 500원 인상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기세등등했던 다수에서 초라한 소수로 전락한 흡연자들은 이제 두 배 가까이로 오른 담뱃값을 조용히 감당하거나 아니면 고락을 함께했던 담배에 이별을 고하는 수밖에 없다.

소설가 김영하씨는 2005년 한 칼럼에서 자신의 금연 성공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담배를 한 보루 사서 한 대씩 피우며 담배와 함께했던 추억을 되새겼다. 마지막 담배를 피우며 그는 담배에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담배여, 그동안 너와 함께 즐거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 때가 다하였다. 나는 너 없는 인생을 살아볼 작정이다. 이제는 헤어져야 하겠다. 내 사랑하는 폭군이여, 안녕!" 그가 담배에게 했던 마지막 인사다.

애연가들이여, 이참에 몸에 나쁘고 이젠 별로 멋지게 보이지도 않는 담배를 끊어보는 건 어떠실지.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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