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에서 외친 '유레카'..몸이 쉴 때도 뇌는 분주하다

2014. 9. 1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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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이언스 온] 베일 벗는 '뇌의 기본 회로'

'뇌는 일할 때 활성화' 오랜 통념 깨고쉴 때 오히려 바빠지는 뇌 영역 발견과제 수행 준비하는 대기 모드 일종성찰, 역지사지, 창의성 등에도 관여휴식 없으면 '기본 회로' 활동도 약화더욱 질 높은 정신 활동 바란다면아무리 바빠도 휴식시간은 꼭 필요

추석 연휴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예년과 달리 추석이 일러 그럴까? 올해 추석은 가을의 시작보다는 휴가철을 마무리하는 여름의 끝처럼 다가왔다. 많은 이들이 일터를 떠나 가족 친지와 흥겹게, 또는 홀로 조용히 쉼을 즐겼으리라. 별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초록 내음이 가득한 산에서, 낯선 외국의 거리에서, 익숙한 고향 집에서,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일을 내려놓고서 말이다.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휴가 때처럼 일손 놓고서 아무 생각 없이 쉴 때에도 우리 몸에는 여전히 쉬지 않는 기관이 있다. 바로 뇌이다. 물론 생명 유지에 필수인 호흡이나 심장 박동을 조절하는 뇌 영역은 당연히 조금도 쉴 수 없지만, 이곳을 빼고도 뇌에는 여전히 분주한 활동에 필요한 많은 혈액이 공급된다. 가수 '리쌍'의 노래 제목을 빌리자면 뇌는 우리가 넋 놓고 쉬는 중에도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다.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뇌가 휴식 중에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최근까지만 해도 뇌는 평소엔 조용히 쉬다가 무슨 일을 할 때에만 바쁘게 가동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오래전인 1929년에 뇌파검사(EEG)를 개발한 독일 신경과 의사 한스 버거가 '뇌는 늘 일정한 활동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의견은 이내 묻혀 버렸다. 이후 과학의 발전으로 뇌의 활동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뒤에도 한참 동안 뇌는 일할 때만 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95년 미국 신경공학자 버랫 비스월이 다시 통념에 의문을 던졌다. 당시 그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의 해상도를 높이고자 불필요한 영상 신호(잡음)를 제거하는 기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뇌가 쉴 때 영상 신호에 섞여 나오는 잡음이 호흡이나 심장 박동처럼 뇌 바깥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잡음의 주된 원천은 뇌 안에서 흘러나오는 느린 주파의 파동이었다.

뜻밖의 발견이 이어졌다. 여러 연구 끝에 뇌가 쉬는 동안에도 오른손을 조정하는 뇌 영역과 왼손을 조정하는 뇌 영역에서 나오는 잡음 신호가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는 이런 발견이 뇌가 쉴 때에도 두 영역이 긴밀히 연결돼 활동을 지속함을 보여준다고 해석했지만 그의 주장은 과학계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그 발견이 측정 오류나 기술적인 다른 문제에서 비롯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뇌의 기본 설정,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2001년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마커스 레이클은 '쉬고 있지만 쉬지 않는 뇌'를 설명하는 새 개념을 제안했다. 1990년대 그는 양전자단층촬영(PET)을 이용해 뇌 연구를 하던 중에 이상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일부의 뇌 영역이 쉴 때엔 부지런히 활동하다가, 오히려 휴식이 끝나면 활동이 줄어드는 현상이었다. 그는 1998년에 이 결과를 학계에 보고하려 했으나 통념과 반대되는 주장을 담은 논문은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나 레이클은 굴하지 않았다. 결국 휴식 상태에서 활성화하는 여러 뇌 영역이 정작 어떤 과제를 수행할 때엔 비활성화하며 이는 과제 수행과는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이런 현상을 뇌가 무언가 일할 때엔 활동이 줄다가 쉴 때엔 다시 활동이 늘어나도록 내정된 기본상태라고 풀이해, '기본상태'(디폴트 모드)의 신경회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랜 통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2년 뒤 다른 연구팀에 의해 기본상태 회로를 이루는 뇌 영역들이 비록 서로 인접해 있지는 않지만 기능으론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이 밝혀졌다. 연구팀은 피실험자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도록 하는 간단한 방법을 이용했다. 기능적 연결성이 확인되고 쉽고 편리한 실험기법이 알려지면서 뇌의 기본상태 회로 연구는 빠르게 늘어났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기본상태 회로라는 개념을 계속 의심했다. 쉬는 뇌에서 관찰되는 느린 주파의 파동이 뇌 바깥에서 오는 잡음일 가능성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3년 독일 출신의 인지신경학자 안드레아스 클라인슈미트가 뇌파(EEG)를 이용해 기본상태 회로가 실제 뇌세포의 활동임을 입증하면서 논쟁의 추는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제 기본상태 회로는 신경과학의 한 분야로 인정받고 있다.

휴식 중의 뇌에 대한 새로운 이해

레이클 교수는 뇌가 쉴 때 기본상태 회로가 활성화하는 것은 뇌 안팎에서 생기는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평가하느라 일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에 여러 연구를 통해 기본상태 회로가 이밖에도 다른 중요한 일에 관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빈둥거릴 때에 바빠지는 기본상태 회로는 휴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뇌과학으로 보여준다.

기본상태 회로는 어떤 일을 할까. 가장 흔하게는 기본상태 회로가 딴생각을 할 때 활성화하지만 이는 일종의 '대기상태'이다. 뇌가 어떤 과제를 수행할 때마다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하지만 다음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를 짐작하는 인지구조가 있다면, 뇌는 모든 것을 필요한 순간에 닥쳐 한번에 계산할 필요가 없게 된다. 차가 예열돼 있다면 뒤늦게 시동 걸 때보다 더 빨리 출발할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기본상태 회로는 '자아성찰', 즉 자신을 되돌아보고 생각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쉴 때 마음속에 여러 장면과 사건을 떠올리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숙고하고, 자서전적 기억을 미래로 투사해 훗날의 자신을 상상하느라 기본상태 회로가 활성화하는 것이다. 잘 쉬어야 공부도 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아 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선 공부가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파악하는 인지능력을 인지심리학에선 '마음 이론'이라 부르는데, 이런 마음 이론에도 기본상태 회로가 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이 잘 발달한 사람은 상대편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관점만으로 상대를 대하기에 역지사지를 잘 못하게 된다. 회사에서 불철주야 일만 하는 직원이 정작 거래처 손님의 응대는 제대로 못해 회사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

아울러 기본상태 회로는 문제 해결과 창의성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흔히 어려운 과제를 만나면 문제를 푸느라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다. 문제 해결을 위해 당연히 이런 노력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잘 쉬어야 한다. 한가로이 휴식을 취할 때 기본상태 회로를 이루는 뇌 영역이 활발히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해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왕이 내준 숙제를 고민하던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친 장소는 연구실이 아닌 욕조였다.

바쁜 현대인, 그래도 휴식이 필요한 이유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인이 성과를 올리기 위해 탈진할 정도로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자기 착취'에 이른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 모습은 어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노동시간, 일상화한 야근과 특근, 0교시 수업과 야간자율학습, 방과후의 학원 순례가 현실이다. 이렇게 바쁜 사회에서 쉼을 강조하면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비칠지 모른다.

하지만 바쁘게 일하고 공부하느라 쉬지 않으면 뇌의 디폴트 모드가 활성화할 여지는 줄어든다. 기본상태 회로가 대기상태, 자아성찰, 마음 이론과 창의성 등에 관여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현대인이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은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아무리 바빠도 쉼은 꼭 필요하다. 자, 읽던 신문을 잠깐 내려놓고 눈을 감아보자. 그리고 느껴보자. 쉬고 있던 기본상태 회로의 기운찬 기지개를.

최강 르네스병원 정신과장

※과학웹진 사이언스온에 실린 글을 필자가 줄이고 다듬어 다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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