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지리산 종주를 하려면 '별'을 따야?

최준혁 2014. 9. 17.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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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 대피소'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폭우, 폭설, 강풍과 같은 천재지변이 가장 먼저 생각나지 않습니까? 전 그랬습니다. 적어도 '국립공원 산악 대피소'에 대한 취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전해드리고 싶은 얘기에 앞서 국립공원 산악 대피소에 대해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국립공원에 있는 산악 대피소는 '대피'의 개념과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정말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면 등산객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대피하는 곳이 되겠지만, 평소엔 일종의 숙박시설이 됩니다. 산에 숙박시설이 왜 필요하냐고 물으신다면, 산과 친하지 않으신 겁니다. 이틀에서 사흘씩 걸리는 '종주'를 즐기는 산악인들에게는 당연한 얘기니까요.

산에서 그냥 야영을 하면 안 될까요? 네, 안 됩니다. 자연보호와 등산객 안전 확보 등을 이유로 대피소 밖 야영, 이른바 '비박'은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대피소를 예약하지 않고서 마냥 산에 올랐다면 '다시 내려가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종주를 하려면 원하든 원치 않든 대피소를 이용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가운데 이렇게 '묵을 수 있는' 대피소를 운영하는 곳은 3곳입니다.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에는 모두 12개의 대피소가 등산객들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 대피소라는 곳이 아무나 다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열두 곳의 대피소가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등산객은 천 명이 채 안 되는데, 종주를 원하는 사람은 훨씬 많기 때문이죠. 산악 대피소를 이용하려면 최고 10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하는 '예약 전쟁'을 치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에 별 따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모양입니다.

이 별을 쉽게 따는 법이 있긴 합니다. 바로 '산악회'와 함께 종주에 나서는 겁니다. 일반인도 대피소 예약이 쉽지 않은데, 산악회라고 별수 있을까 싶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약 경쟁'이 공정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취재진이 국립공원 관리공단에 요청해 8월 한 달간의 예약자 현황을 뽑아봤습니다. 정확하게는 예약에 성공한 사람들의 휴대전화 번호 목록을 살펴봤습니다. 예약자는 예약에 성공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기 위해 반드시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게 돼 있는데요. 1인당 한 달에 4번으로 예약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원칙대로 운영이 됐다면, 같은 전화번호는 4번 이상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약자 현황을 살펴보니, 수십 개씩 겹치는 번호가 여럿 발견됐습니다. 원칙대로 운영이 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이 번호로 이른바 '구글링'을 해봤더니, '△△산악회', '☆☆산우회', '□□산악회'의 대표번호로 나옵니다. 이들 산악회의 대표 번호로만 예약된 건수가 적게는 19건에서 많게는 69건까지 됐습니다. 한 번 예약할 때 4명의 몫까지 예약할 수 있으니 적게는 수십 자리에서 많게는 수백 자리의 대피소를 '과점'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들 산악회는 이런 방식으로 인기가 많은 날, 인기가 많은 대피소의 자리를 최고 40% 넘게 선점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 성공하기도 어려운 예약을 어떻게 이렇게 마구잡이로 해낼 수 있었을까요? 이들 산악회에 전화를 걸어 물어봤지만, 자신들은 떳떳하다는 말 이외에는 별다른 답변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이들이 일반인들과 다른 방법을 쓴다는 건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특정 산악회가 열 건 안팎의 예약을 10초 안팎에 성공했다는 게 실마립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방법으로 컴퓨터를 실행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쓴 걸로 추정되는데, 여러 대의 컴퓨터를 사용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산악 대피소 예약 프로그램을 수정해달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절대 불법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그렇다면, 산악회가 이렇게 대피소를 편법 선점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답이 나옵니다. 미리 선점해 둔 대피소 자리를 이용해 '유료 산행 일정'을 만들고 여행 상품처럼 팔고 있었던 겁니다. 1무 1박 3일부터 2박 3일까지 종주 기간은 물론, 출발 날짜도 평일과 주말, 휴일 등 다양하게 구성된 '상품'이 대피소 예약에 실패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산을 잘 아는 사람이 동행하고, 전세버스도 대신 마련해 주니, 상부상조"라는 게 산악회 관계자의 말입니다.

가격은 어떨까요? 이들 산악회는 전세버스 이용료와 대피소 숙박료, 모포 대여료를 더해 9만 원에서 12만 5천 원의 돈을 받고 있었습니다. 대피소의 하루 이용료는 8천 원, 시외버스 이용료는 왕복 5~6만 원 선입니다. 대충 계산해 봐도 몇 만 원이 남습니다. 비싸다, 비싸지 않다 하는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산악회의 이런 편법, 제재할 수 없을까요? 안타깝지만, 불법이 아니라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이들이 프로그램을 쓰든, 이를 여행상품처럼 팔든, 뭔가 불공정한 건 확실한데, 강제로 못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산악 대피소를 관리하는 국립공원 관리공단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만, 현명한 대안을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1인당 예약횟수를 제한하고, 여름 성수기에 추첨제를 도입한 건 궁여지책이었지만, 편법의 뿌리를 뽑기엔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보도가 나간 뒤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다가올 가을 성수기에도 추첨제를 확대 적용하기로 한 겁니다. 일면 반가운 소식입니다. 대피소 예약을 입맛대로 해온 특정 산악회에겐 그렇지 않겠지요. 아마도 "특정 산악회의 대피소 선점을 조금 더 불편하게 해 조금이라도 편법 선점을 줄이겠다"는 관리공단 관계자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조금 더 공정한 결과가 나오게 될까요?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 바로가기 [뉴스9] 국립공원 대피소 예약, 산악회가 편법 '싹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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