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블랙박스는 '판옵티콘'] 당신이 한 일 '블랙박스'는 알고 있다

양민철 백상진 기자 입력 2014. 8. 23. 03:18 수정 2014. 8. 23.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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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저녁 김수창 당시 제주지검장의 음란행위 의혹이 불거지자 경찰이 제일 먼저 수소문한 것은 현장을 지났던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이었다. 이미 주변 CCTV 영상이 공개됐는데도 김 지검장이 강력히 혐의를 부인하자 '확증'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정형 CCTV는 화면만 녹화되지만 블랙박스는 음성도 녹음된다. 야간에 차량 번호판을 식별할 만큼 영상도 선명하다. 여기에 이동하면서 녹화되기에 또 다른 용의자가 발견될 수도 있다.

이제 차량 블랙박스는 단순한 교통사고 책임 규명 용도를 넘어섰다. 운석 추락 장면이 찍히는 천체관측 도구가 됐다가 길거리 범죄의 중요한 '증인'이 되기도 한다. 때론 불륜의 '목격자', 연예인의 '파파라치'가 돼서 갈등의 씨앗을 제공할 때도 있다. 변화무쌍한 블랙박스를 두고 범죄 사각지대의 공익 감시자 역할을 한다는 긍정론과 함께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21세기형 '판옵티콘(원형감옥)'이 되리란 우려도 나온다.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사는 박모(29)씨는 최근 아파트 이웃 A씨가 내심 못마땅했다. A씨는 장애인이 아니면서 승용차를 장애인 주차구역에 버젓이 세워두곤 했다. 괘씸한 생각이 든 박씨는 차량 사진을 찍어 불법주차로 신고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차량에 설치된 '블랙박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22일 "운전자가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해서 내가 신고한 걸 알면 괜히 해코지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직장인 전모(26·여)씨는 지난 10일 택시를 탔다가 크게 당황했다. 뒷좌석에 앉아 화장을 고치는 자신의 모습이 룸미러 아래 설치된 블랙박스에 고스란히 녹화되고 있었다. 전씨는 "엉망이던 내 얼굴이 그대로 찍히고 있었다. 과거 남자친구와 뒷좌석에서 몰래 입맞추던 모습까지 찍혔을 거라 생각하니 무척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며 "블랙박스 설치 안내문이 붙은 택시는 거의 못 봤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힙합가수 최자와 아이돌 여가수 설리의 거리 데이트 장면이 포착된 것도 차량용 블랙박스를 통해서였다.

서울의 30대 직장인 B씨는 "혼자 가끔 블랙박스에 녹화된 영상을 들여다보곤 한다"며 "흔히 '김여사'로 불리는 초보운전자의 모습이나 거리를 걷는 늘씬한 여성의 모습이 찍혀 있으면 인터넷에 올려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고 털어놨다.

블랙박스는 지난해 기준 약 450만대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행부가 추산한 CCTV 설치 규모(420만대)를 뛰어넘었다. 올해 차량 블랙박스 신규 설치만 240만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익명의 공익 감시자

블랙박스에 부정적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교통법규 위반 차량을 적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올 들어 시민이 블랙박스 등 영상매체를 이용해 신고한 교통법규 위반 행위는 5월까지 5만3400건이나 된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124.2%를 기록했다. 차량 밖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는 그동안 사실상 단속이 불가능했지만 요즘은 블랙박스 때문에 수시로 적발된다. 서울 강남구에서만 지난해 195명이 이렇게 담배꽁초를 버리다 인근 차량 블랙박스에 찍혀 처벌됐다.

범죄 예방 효과도 있다. 경기도 용인의 김모(25)씨는 지난달 밤늦게 귀가하던 여동생을 길에서 추행한 범인을 추적하며 블랙박스의 도움을 받았다. 경찰 협조를 얻어 주변 주차 차량의 블랙박스를 확인한 결과 고교생 4명의 인상착의와 학교를 알아냈고 이들을 찾아내 사과를 받았다.

블랙박스 기능도 점점 진화하는 중이다. 최근 출시되는 블랙박스들은 전후방 모두 100도 이상의 시야각을 촬영할 수 있어 사각지대가 거의 없다. 주행 상태와 상관없이 항상 찍히는 '상시녹화', 주차 상태에서도 촬영을 계속하는 '주차녹화' 기능도 있다. 녹화 가능 시간은 블랙박스의 저장 공간(메모리카드) 용량에 따라 다르지만 HD 고화질 영상을 최소 24시간에서 최대 92시간까지 녹화할 수 있다. 저장 공간이 가득 차면 오래된 영상부터 자동 삭제하는 기능도 있어 한번 설치하면 다시 손을 댈 이유도 없다.

블랙박스를 규제하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된 신차의 95%에 블랙박스가 달려 있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모든 신형 차량에 블랙박스 장착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블랙박스가 교통사고뿐 아니라 다른 범죄 수사에도 이용되면서 활용 지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해 국가안보국(NSA)의 개인정보 비밀수집 파문까지 일면서 전문가들은 "자동차 블랙박스에 담긴 정보를 이용하는 데 제한을 두지 않으면 악용될 소지가 많다"고 우려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시작됐지만 속도는 지지부진하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상민 의원은 지난해 '자동차 블랙박스 설치를 의무화하되 교통사고 조사 및 범죄 예방 목적 외엔 촬영된 영상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교통안전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상임위에 계류된 상태다.

블랙박스 실태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안전행정부는 공공기관에 설치된 CCTV의 규모만 57만여대로 파악하고 있을 뿐 민간 CCTV는 420만대 정도로 추측만 하는 상황이다. 블랙박스 설치 규모 역시 업계의 어림짐작에 의지하고 있다.

규제 방안이 지지부진한 사이 사생활 침해 우려가 큰 신종 기기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올해 말 미국에서 정식 발매될 예정인 '구글 글래스'가 대표적이다. 안경 형태의 구글 글래스를 얼굴에 쓴 채 "비디오를 녹화해"라고 말하면 즉시 HD 고화질 영상의 녹화 및 공유가 가능하다. 사용자 입장에선 편리한 기능이지만 '도촬(도둑 촬영)' 공포도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톨루나의 조사 결과 미국인의 72%가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구글 글래스 사용에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지난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 술집에서 구글 글래스를 쓰고 있던 여성이 다른 손님에게 폭행 당하기도 했다. 호주 영국 등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수집을 제한하는 법규를 제정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양민철 백상진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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