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피아'가 신림동 고시촌 들쑤셨다

조유빈 기자 2014. 7.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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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19일 '행정고시(5급 공채) 축소' 구상을 밝혔다. 두 달 정도가 지난 7월 중순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서 기자가 만난 행정고시 수험생들은 한결같이 "세월호 참사 이후 갑작스럽게 제기된 '관피아'와 행정고시 공채 인원 축소 문제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박 대통령 발언 이후 2014년 행정고시 2차 시험을 마친 고시촌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결국 사법시험처럼 폐지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행정고시 준비생들이 신림동 고시촌을 하나둘 떠나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7월17일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야경. ⓒ 시사저널 임준선

수험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3년째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김정현씨(28)는 "일단 내년부터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할지 청사진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고 마냥 공부만 하고 있자니 불안하다"고 말했다.

신림동 고시촌 학원 앞에서 만난 한 수험생은 공무원 시험 학원 전단지를 들고 있었다. 기자가 '행시 수험생 아니냐'고 묻자 그는 "행시 선발 인원이 줄어들면 합격하기 힘들 것 같아 고민 중"이라며 "7급 공무원 시험으로 '하향 지원'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아 공무원 시험 강의 시간표를 보고 있다"고 답했다.

'5급 공채 축소·폐지 반대' 서명운동

2010년 4만명 정도이던 신림동 고시촌 수험생들은 사법고시 폐지 발표 이후 그 수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에 요즘 행시 축소·폐지 문제까지 불거지자 이 지역 상인들은 여간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시와 외시 폐지로 쇠락한 상권이 행시 축소·폐지로 더 위축될 것을 우려했다.

수험생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고시촌 독서실은 예전에 늘 가득 찼다. 하지만 요즘은 썰렁하다. 수험생 입주가 줄어들면서 빈자리가 늘어났다. 고시촌 부동산 경기도 위축되긴 마찬가지다. 한때 우후죽순 생겨났던 원룸은 입주민이 없어 빈방이 널려 있다. 빈방이 없어 대기하면서 연락을 기다려야 했던 예전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수험생 이하나씨(30)는 "요즘엔 수험생보다 싼 방을 구하려는 젊은 직장인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원룸에 입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관악구 지역 주민들이 만든 관악발전협의회 이석근 회장은 "관악구 상권과 지역 발전 문제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주는 국가 제도는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16일 열린 관악발전협의회 창립 1주년 행사에서 유종필 관악구청장은 "사법시험이 존치되면 좋은 일이고 행정고시가 축소되면 우려스러운 일"이라며 행시를 그대로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고시와 같은 획일적 선발 방식이 아니라 필요한 직무별로 전문가를 뽑는 체제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박 대통령의 행시 축소 발언이 나온 직후 수험생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행시 수험생들이 모인 인터넷 '행시사랑' 카페를 중심으로 5월20일부터 6월10일까지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수험생들은 신림동 고시촌 일대와 광화문 등지에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전국의 대학 고시반과 수험생들도 우편을 통해 서명지를 돌렸다. 20여 일간 2000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행정고시 수험생 대표 이현정(24)씨는 행시 축소와 민간 경력자 채용 확대에 반대하는 민원서를 안전행정부 인력기획과에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수험생들은 민원서를 통해 "정부는 민간 경력자를 채용하는 것이 관피아 문제점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지만 어떠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도 없다"며 "오히려 민간 경력자 채용은 민관 유착을 더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종섭 신임 안전행정부 장관이 7월17일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민간 경력자 선발, 민관 유착 가능성 더 커"

군 복무 특혜와 위장 전입, 자기 논문 표절 등 의혹이 불거졌지만 박 대통령은 7월16일 정종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안전행정부장관으로 임명했다. 정종섭 장관은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로스쿨 원장, 로스쿨협의회 이사장 등을 지내 '로스쿨의 아버지'로 불린다. 2011년 로스쿨협의회장을 맡고 있을 때 그는 "로스쿨생들이 행정부 등 정부 영역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이 옳다는 측면에서 보면 행정고시 제도는 이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림동 ㄱ학원의 정 아무개 강사(46)는 "사법고시와 외무고시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고시 폐지가 무조건 정답은 아니다"며 "로스쿨은 점점 귀족학교가 돼가고 있다. 외무고시 폐지 이후 어떻게 됐나. 유명환 전 외교부장관 딸 사건에서도 나타났듯이 민간 경력자 채용이 오히려 현대판 음서 제도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2010년 7월 실시된 5급 사무관 특별 공채 과정에서 당시 유명환 장관의 딸이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그로 인해 유 장관은 불명예 퇴진했다. 3년째 행시를 준비해오고 있는 오 아무개씨(31)는 "민간 경력자 채용 후 사건이 터지면 다시 행시 합격자를 늘릴 것인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부는 6월26일 5급 민간 경력직 공무원 채용을 공고했다. 110개 분야에서 총 130명을 선발하는 이번 채용은 2011년 제도를 도입한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이에 대해 수험생들은 "여론 수렴 절차가 없는 일방적인 행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안전행정부 관계자는 "필요한 수의 경력직 공무원을 채용할 예정"이라며 "향후 행시 축소나 민간 경력자 채용 확대에 관해 확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조유빈 기자 / you@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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