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푸틴, '기미상궁' 고용..소금, 후추통도 들고 다녀

최고운 기자 2014. 7. 30. 09:1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는 사월이라고 불리는 기미 나인이 등장합니다. 배우 심은경 씨가 이 역할을 맡아서 연기했었는데요. 왕을 독살하는 명령을 받은 후 고민하다가 결국 독이 든 사탕을 자신이 먹고 죽고 맙니다. 이렇게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종종 임금 옆에서 먼저 음식 맛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이 맛이 있나, 없나를 살피는 게 아니라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검사하는 '기미(氣味)'를 하는 것입니다. 독의 유무를 판별하는 데는 은수저나 은비녀가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독이 들어있을 경우에는 수저나 비녀의 색깔이 변하기 때문이죠. 기미는 왕의 식사는 물론 왕이 먹는 녹용이나 인삼 등 각종 약이나 탕제도 해야 합니다. 평소 접하기 힘든 귀한 음식이나 약재를 먹어볼 수 있다 보니 궁에서는 상당히 인기가 많은 자리였다고 전해집니다.

옛날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최근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현대판 '기미상궁', 즉 검식관을 데리고 다닌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 원문보기) 푸틴이 검식관을 고용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곳은 런던에서 열린 '정상 셰프 클럽(The Club des Chefs des Chefs)'입니다. 정상 셰프 클럽은 국가 원수나 세계적인 지도자들의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들의 모임입니다.

원수나 지도자들의 식습관을 가장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재미있는 건 이 모임에 푸틴의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빠서 못 온 게 아닙니다. 푸틴의 음식은 요리사가 아닌 경호요원 가운데 한 명이 준비부터 시식까지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소금, 후추, 소스, 병에 든 물, 냅킨까지도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실 요즘 같은 국제 정세에서 푸틴이 민감하게 구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한 이후 미국과 유럽은 한 몸처럼 똘똘 뭉쳐 러시아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레이시아 여객기 피격 사건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러시아는 사면초가 상태에 몰렸습니다. 중국이 뚜렷한 압박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라고 해야 할까요? 서방의 제재 조치 발표 이후 푸틴은 '터무니없다, 아픈 대응 조치를 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입니다.

국가 정상이나 그 일가족에 대한 독살 시도는 예로부터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로마 제국의 4대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는 독이 든 버섯 요리를 먹고 독살 당했습니다. 검식관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아내인 아그리피나가 네로를 황제로 등극시킨 후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할 욕심에 클라우디우스가 좋아하는 생굴에 독을 넣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인도 통일을 이끈 찬드라굽타의 부인도 찬드라굽타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먹고 숨졌습니다.

왕을 독살하는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고종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고종은 식혜를 마신 뒤 30분 도 채 지나지 않아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때 고종의 시신을 염한 사람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로 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랐다.' '이가 모두 빠져있었고, 혀가 닳아 있었다.' '검은 줄이 목에 나 있었다.' '궁녀 2명이 의문사 했다.'라는 말을 전하면서 독살설이 퍼졌습니다. 공식적으로 조사된 바가 없기 때문에 명확한 사실 관계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고종 독살설이 3.1 운동을 불러일으킨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렇다 보니 20세기 이후 지도자 중에서도 음식에 예민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는 검식관이 철저하게 확인한 음식만을 먹었습니다. 히틀러의 검식관이었던 마고트 우엘크라는 이름의 할머니는 지난해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자신을 포함한 15명이 히틀러의 밥상에 오르는 음식을 미리 먹어보는 임무를 맡았다고 말했습니다.

음식은 모두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최상급 채소로만 만들어졌는데도 항상 독을 먹을까 두려웠고, 매일 입에 대는 음식이 마지막 식사라는 생각을 했었다는 고백도 털어놓았습니다. 인디펜던트 표현에 따르면 '뇌세포보다 적이 많았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여러 명의 검식관을 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 주방에서 요리된 후 제복을 입은 웨이터가 가져다주는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정상회담 등을 위해 해외로 나가야 할 때는 경호원들이 사전에 메뉴를 파악해서 워싱턴에서 재료를 공수했다고 합니다.

그럼 검식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할까요? 독에 대한 지식, 혀끝으로 맛을 보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걸까요? 이에 대해 인디펜던트는 현대판 기미상궁에게는 더 이상 실제로 음식을 먹어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고 단호히 결론지었습니다. 검식관들은 이미 음식 준비 단계에서부터 투입되기 때문에 다 만들어진 음식을 먹어봄으로써 적이 독극물을 넣었는지를 살필 시회는 거의 영에 가깝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이 검식관에게 음식을 먹어보도록 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이겠죠?최고운 기자 gowoon@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