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로 흘러선 안돼".. 네덜란드, 조용한 추모

김성현 기자 2014. 7. 2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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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공군기지. 지난 17일 피격된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MH17) 사망자를 실은 네덜란드·호주 군용기 두 대가 활주로에 차례로 착륙했다.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 부부는 검은 상복 차림으로 활주로에 직접 나와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맞았다. 희생자 유족들과 호주·말레이시아 등 10개국 대표도 참석했다. 군용기가 착륙하기 5분 전부터, 네덜란드 전역에서는 교회 종소리가 울렸다.

전체 희생자 298명 가운데, 우선 수습된 시신 40여구가 사고 6일 만에 '귀환'한 것이었다. 이 희생자들은 친러 반군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지대공(地對空) 미사일에 피격된 이후, 소련 시절부터 쓰였던 낡은 기차의 냉동 차량에 줄곧 '누워' 있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희생자 시신이 도착한 23일을 국가 추모일로 지정했다. 사고 희생자 가운데 193명이 네덜란드인이었다. 네덜란드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프로필 사진을 검은색 리본으로 바꾸는 온라인 추모 운동이 벌어졌다.

이 희생자들에게 '귀향길'은 고되고 멀었다. 희생자 시신을 실은 기차는 사고 나흘 만인 21일 우크라이나 동부 토레즈역을 떠났다. 하지만 기계적 결함으로, 또다시 반군 검문소 통과 때문에 기차는 수시로 멈춰 섰다. 당초 서너 시간이면 충분했던 열차 이동 시간은 16시간을 훌쩍 넘겼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국제 조사단이 기다리는 하리코프에 기차가 내린 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군용기에 희생자 시신을 싣고 네덜란드로 향했다.

다른 한편으로 네덜란드에서는 차분한 일상이 지속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20일 로테르담에서는 야외 일렉트로닉 음악 축제인 '크레이지 섹시 쿨' 페스티벌이 예정대로 열렸다. 페스티벌에 몰려든 관객만 1만여명에 이르렀다. 사고 이후에도 취소된 행사는 없었다고 로테르담 시청은 밝혔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네덜란드인은 남들 앞에서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다, 고난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걸 명예로 여긴다"고 전했다.

나치 협력과 식민 지배 등 네덜란드의 암울한 과거사에 대한 자기반성도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치닫는 경향을 억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네덜란드 중견 소설가 아르넌 그룬버그는 NYT 기고에서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에 많은 관료들이 협력했고, 인도네시아 등을 식민 통치했던 경험 때문에 전후(戰後) 네덜란드에서 민족주의는 나쁜 것으로 간주됐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월드컵 같은 스포츠 행사를 제외하면 네덜란드에서 공개적으로 민족주의를 표출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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