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을 넘어 다시 만난 최치원의 풍류

권근영 입력 2014. 7. 24. 03:04 수정 2014. 7. 24.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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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문집 등 모아 특별전영감 받은 사진·그림도 함께 전시

"스님아,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산이 좋다면 무슨 일로 다시 나온단 말인가. 두고 보라, 뒷날 나의 자취를.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최치원, '어느 산승에게(贈山僧)')

 영재로 조기 유학했고, 해외에서 먼저 입신했다. 고국에 돌아왔으나 신분제의 벽에 부딪혀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 최치원(857∼?)이다. 12세에 당시 동아시아의 중심이던 당에 유학해 18세에 외국인으로 최고 성적을 거두며 급제했다. 25세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명을 떨쳤다. 28세(881년)에 위기의 신라를 구하고자 귀국, 38세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라는 사회개혁안을 제시했으나 실패했다. 42세에 천하를 돌아다니다 52세 이후 신발만 남긴 채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선 30일부터 9월 14일까지 '최치원-풍류의 탄생'전을 연다. 최치원이 남긴 문집, 비문과 현판의 탁본, 그의 영정 외에도 오늘날의 미술가·서예가·무용가 등의 작품 100여 점이 함께 전시됐다. 박대성·박원규·정종미·최정화 등이 참여한다. 최치원이 1000여 년 전 지나간 현장을 되짚어 가며 그의 사상과 문학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다채롭게 구성했다.

 전시장 들머리엔 장승을 닮은 목조가 두 개 놓였다. 관복 차림의 최치원, 봉두난발한 최치원이 각각 그려져 있다. 역사 인물을 연구해 온 화가 서용선의 작품이다. 출세와 입산, 외롭고 괴로웠던 그의 일생을 담았다. 그 왼쪽 벽면 가득 최치원이 썼거나 그와 관련된 지역의 탁본이 걸렸다. 오른쪽엔 배병우의 경주 삼릉 소나무 사진들이 걸렸다. 최치원의 실존 공간이다.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고 있건만,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적네. 창 밖에 밤비 오는데, 등불 앞 만리의 마음이여."(최치원,'추야우중(秋夜雨中)')

  왜 지금 최치원인가. 예술의전당 이동국 서예부장은 "최치원은 풍류의 원형질이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풍류를 정의했고, 풍류라는 이름으로 유교·불교·도교 사상의 정수를 합쳤다"고 설명했다.

 탄광촌 화가 황재형이 소환한 최치원의 이미지가 강렬한 답이 될 듯하다. 세월호 사고에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초상을 붓 대신 손가락을 짓이겨 그린 그림의 배경엔 '피가 거꾸로 솟듯' 뒤집힌 최치원 영정을 희미하게 그렸다. 목민관이자 사회개혁자였던 최치원이 오늘의 한국을 어떻게 볼까 묻는 듯하다.

 매주 토요일 오후 5시, 전시장 마지막 방에서는 무용가 홍승엽, 서예가 최형주·허회태 등의 '필가묵무(筆歌墨舞)'가 어우러진다. 입장료 4000원. 02-580-1300.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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