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공허한 ‘4대 사회악 척결’ 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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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5·16 혁명공약’ 제3조는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였다. 군사정권은 이 공약에 따라 부정축재자와 깡패는 물론 댄스홀 출입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깡패 몇 명은 사형당했고 우발적으로 댄스홀에 출입한 ‘풍속사범’들까지 징역형에 처해졌으며, 재수 없게 걸린 동네 ‘불량배’들은 ‘국토재건대’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나 부정축재자들은 국가 재건에 이바지하겠다는 각서 한 장만 쓰고 대개 슬그머니 풀려났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 사건, 워커힐 사건, 빠찡꼬 사건 등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로써는 사상 최대 규모였던 이 엄청난 부정부패 사건의 일부가 알려지자 세간에는 ‘구악 뺨치는 신악’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남을 총칼로 위협하여 꼼짝달싹 못 하게 해놓은 자들이 그 남에게 베푸는 최고의 선행은, ‘제때 밥 주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기 마련이다.

이른바 ‘4대 사회악 척결’은 이 정부의 핵심 공약이다. 지금도 시내 곳곳에는 “4대 사회악 척결하자” 따위의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경찰이나 이런저런 관변단체들이 내건 이 현수막들에서 5·16 직후에 풍미했던 ‘구악일소’라는 구호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또 가정폭력, 학교폭력, 성폭력, 불량식품이 과연 오늘의 우리사회를 근본에서 위협하는 사회악으로서 다른 어느 것보다도 먼저 척결해야 할 대상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당사자들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행위들을 척결하자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정부와 여당, 그리고 그와 밀착한 일부 ‘사회지도층’이 ‘4대 사회악 척결’을 소리 높여 외치기에 부끄럽지 않은지는 좀 생각해 볼 문제다.

국정원, 군 사이버사령부, 보훈처 등 국가기관들이 대선에서 여당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 불법으로 여론을 조작하려 했던 사실의 일단이 드러나고, 그 중 국정원 요원의 댓글로 밝혀진 것만 5만개가 넘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당과 다수 언론은 “그 정도 댓글로는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며 논점을 흐린다. “법이 금지한 물질을 음식에 집어넣기는 했지만, 그거 먹고 죽은 사람은 없지 않으냐”며 되레 큰소리치는 불량식품 제조업자와 이들이 뭐가 다른가? 또 다수 언론은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 개입에 대한 야당과 시민사회의 항의를 ‘여야 간 정쟁’의 프레임 안에 가두려 든다. 배우자 구타를 ‘단순한 부부싸움’으로 호도하는 상습 가정폭력 사범과 이들이 뭐가 다른가? 이 정부의 핵심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도 전면 후퇴하거나 폐기되었다. 학교 폭력의 주범인 ‘일진’들이 “대기업이 소기업을 상대로 하는 짓이나 기업주가 노동자에게 하는 짓이 우리가 약한 애들에게 하는 짓과 뭐가 다르냐”고 항변하면 뭐라 대답할 것인가? 성폭력? 이 정부 출범 이래 몇몇 정부 고위층의 ‘성추문’들을 다시 소개하느라 지면을 더럽힐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른바 ‘4대 사회악 척결’ 구호를 더 우습게 만드는 것은 최근 들어 “한국은 독재해야 돼”나 “유신시대가 좋았다”며 독재를 찬양하는 말들이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거리낌 없이 튀어나오는 현실이다. 가정폭력은 가부장 독재가 표현되는 방식이며, 학교폭력과 성폭력은 강자 독재가 표현되는 방식이다. 상대의 의사와는 아랑곳없이 제 욕심만 채우고 제 주장만 관철하기 위해 동원하는 수단이 폭력이다. 독재 체제는 국가 폭력이 일상화한 체제다.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른 사람을 잡아들여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해서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운 뒤, 사법부까지 동원해 사형시키고, 그 가족들마저 고개를 들고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게 독재 권력이 자행하는 국가 폭력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회 어느 곳에도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운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는 없다. 그런 국가 폭력을 공공연히 찬미하면서 학교와 가정의 폭력이나 척결하자고 외치는 건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가정폭력, 학교폭력, 성폭력, 불량식품, 모두 척결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똥걸레를 손에 쥐고 설거지하겠다고 나서서야 되겠는가? 지금 이 사회의 안녕을 근본에서 위협하고, 이 사회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악 중의 악’은 독재 권력을 공공연히 찬미하고 그 재림을 주장하는 자들의 사악한 언행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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