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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남의 찬양을 따라가는 교회, 우리의 찬양을 만들어 나가는 교회


 1. 찬양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솔직히 까고' 말해보자. 계속해서 최근 몇년 동안 교회 안에 '찬양의 대세'가 있었지 않았는가. 2~30년 전부터 돌이켜보면, 그게 처음에는 다드림선교단과 주찬양(?) 선교단으로 시작해서, 올네이션스의 경배와 찬양과 예수전도단의 양대산맥을 쌓아오다가 예전단이 9집 부흥으로 대박 터트린 이후에 10집이 찬양팀들이 원하는 게 아니라 마침 떠오르기 시작하던 다윗의 장막에 공이 넘어간 이후, 옹기장이나 어노인팅이 조금 뜨다, 다시 예전단 캠퍼스 워십으로 돌아왔다가 (특히 3~4집의 영향으로), 요 1년 전 새부터는 다시 마커스가 뜨고 있다. 그리고 1-2년 후에는 또다시 어디에선가 신보가 나올 것이고, 그 신보의 찬양이 일반 대중 교회에 들어가 다시 교회들이 그 노래를 부를 것임이 확실하다. 어쨋든 한국 교회의 찬양들은 요즘 신보에 좌우되고 있다.

 2. 찬미예수 500에서 최용덕 간사님이 쓴 글들을 읽어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아예 절판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찬양집 말미에 그가 쓴 두개의 글들은 모두 한국 교회의 찬양에 있어서 중요한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한국에는 성령이 1938년 이후 돌아가셨습니까?"라는 과격한 내용의 글로서 이와 함께 찬양의 분류 (경배, 찬양, 수평적 노래) 등을 다룬 것이었고,그리고 하나는 '새 찬양 증후군'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처음에 내가 어려서 이 책을 읽었을 때, 최용덕씨의 첫번째 글은 쉽게 받아들였었지만 두번째 글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찬양을 많이 아는게 어때서? 문제가 되지 않는 것 아닌가?'

 사실 그 쯤에 내가 교회에 있었을 때에서도 '찬양을 많이 아는 것'이 중심이 되었었고, 교회의 찬양들을 빨리 쫓아가는 것이 중요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 청소년 때에는 그럴 수 있더라도, 결국 나이가 들면서 새 찬양보다는 옛 찬양들을 더욱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 새 찬송가대신 통일찬송가가 많이 쓰이고 있는 이유, 그리고 새 찬송가에서도 통일찬송가 부분의 곡들만 사용하고 있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결국 많은 찬양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는 최소한 10~20만개 이상의 찬양이 쌓였고, 우리가 제대로 활용하더라도 평생 2,3000개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그중의 1%만이 전 세계적으로 계속해서 불리고 있다. 결국 찬양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각주:1]

 그러므로, 최용덕 간사님이 지적한 '새 찬양 증후군'이 한국 예배자들가운데 많이 퍼져있다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자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만 찬양하면 하나님을 잘 경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 안의 재촉, 혹은 부족함, 욕구가 있어서 그런것은 아닐까.

3. 그러므로, 한국의 '대세'나 '신보'에 대한 열망이나 갈망은 어느새 우리를 진정으로 찬양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곡에 집중하는 것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잘못 하다가는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대상이 경배받아 마땅하신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찬양곡에 집중되기 십상이다. 이것은 가톨릭에서도 수호천사를 숭배하는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에게서 우리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고자 하는 사단의 획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들이 있듯이, 우리 안에서도 대안적인 움직임들이 있다.

4. 최근 우리 교회에서는 계속해서 담임목사님이 작곡하신 찬양들이 발표되어 불리어지고 있다. 코드가 모두 G코드들인 것은 약간 안타깝지만, 그러나 만들어진 노래 모두 정말 부르기 좋고 계속해서 불리어지는 곡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이런 가사들이다.

날마다 행복한 교회 마음이 따뜻한 교회 성령의 은혜가 풍성한 교회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며 흘린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 만들어가요
- '날마다 행복한 교회' 중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네
말씀의 검 우리를 찔러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네
-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즐거운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맘으로 노래하며 찬송하네
아버지께 감사해 주님께 찬양해
- '술 취하지 말라'

 정말 이러한 가사들이 우리 교회에서만 불리워지고 있는 것은 약간 안타깝기도 하다. 이 노래를 다른 사람들에게 퍼트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찬양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찬양이 드려지는 것이다. 이번에는 이런 가사들도 살펴보자.

찢겨진 산하 위로 겨레의 눈물 굽이치고
패역한 이 땅 위에 상한 영혼 쓰러져갈 때
형제여 우리는 잠들어 있었는가
예수의 이름이 멸시 받고 짓밟혀도
형제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내 형제여
겨레의 역사 위에 이제 복음의 기를 들자
주여 우리 눈물 씨앗 되어 새 땅에서 피어나게
예수의 피 안에서 하나 되어 서게 하사
겨레의 십자가 지게 하소서
우리 여기 있나이다 우리를 보내소서
우리 싸움 야훼의 싸움 마치는 그 날까지

- '겨레의 십자가'

나는 너를 용사로 부른다 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
그 심판과 구원의 칼을 네게 주노라
나는 너를 용사로 부른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
그 진노와 축복의 낫을 힘껏 잡아라
네가 예수와 함께 못 박혔듯이 너도 세상으로 십자가를 맛보게 하라
네가 예수와 함께 일어섰듯이 너도 세상으로 생명의 꿈들을 솟구치게 하라
- '나는 너를 용사로 부른다'

 그렇다. 아마 <많은 물소리>에서 많이 보았을 뜨인돌의 곡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당신들은 이 노래를 교회에서 부른 적이 있었는가? 교회 회중이 이런 노래를 회중 예배 시간에 불러본 적이 있는가? 아닐 것이다. 이런 노래를 교회에서 부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겨례의 십자가'는 민중가요풍이라 찬송가나 워십 분위기의 곡들에만 익숙한 교회에서 부를리 만무하고, '나는 너를 용사로 부른다'는 노래 분위기가 맞지 않거나 가사가 왠지 폭력적(?)인듯 해서 부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사람들의 분위기에 따라서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곡은 하나님의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곡을 부를 용기나 담대함, 자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5. 예수전도단 8집과 9집으로 대표되는 고형원 전도사님의 음반들은 한국 교회를 휩쓸었고, 아마 예배를 자주 드리는 사람이라면 이 둘의 대표곡인 '부흥'과 '부흥 2000'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전도단은 그 두개의 붐을 가지고 나서 다음곡을 부흥 시리즈에 이어주지 않았다. 예수전도단은 한국 내에 있는 10집 증후군[각주:2]을 감안해서라도 그 마지막 음반을 국악 찬양에 몰아주었다. 현재는 인천에서 <셈의 장막>을 운영하고 계신 손해석 목사님이 자신이 지은, 또는 개곡한 노래들로 채웠다. 그러나 이 곡들을 마주한 찬양 대중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결국 이 노래들은 거의 불리어지지 않고, 요즘은 예수전도단 안에서도 다시 모던워십 분위기를 선호하는 캠워나 화모가 그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셈의 장막이나 제주 열방대학 상황화예배센터가 계속해서 전통찬양들을 이끌어내고 있지만, 아직 붐을 일으키려면 멀었다.)

 그 곡들 중에 <마음 속에 근심있는 사람>은 아직도 내가 잊지 않고 계속해서 가끔씩 듣는 곡인데, 우리나라의 판소리와 현대음악을 적절히 조합시킨 곡이다. 아니리 형태로 이루어진 랩을 듣고 있다 보면, '정말 이런 표현도 가능하구나!'라는 감탄을 잊어버릴 수 었다. 하지만 이런 노래가 대중속에서 들려질 수 있을까?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또 돌아보고> 같은 곡보다는 100배나 더 나은 곡인데, 그냥 흘려지는 곡으로 넘어서는 것이 아깝다. 정말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우리는 왜 찾을 수 없는 걸까.

6.

"우린 아침마다 기도회가 있어요. 찬송가두 부르구요. 촌 여자들이 제가끔 작곡을 해가며 부르는 찬미야말루 들을 만허죠."
- 심훈, 상록수 4장

 심훈의 상록수를 보다 가장 마음에 남은 말 중에 하나다. 채영신이 인도하는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부분이 '작곡을 해가며 부르는 찬미'다. 즉 1930년대만 해도 우리는 외국의 찬양을 부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찬양을 만들어서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뜻으로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물론 요 근래 5년 동안에는 우리 한국인들이 만드는 새로운 찬양들이 회복되었다. 아니, 이 움직임들은 이미 <부흥>에서부터 시작된 움직임이었다. 이젠 마커스에서도, 어노인팅에서도, 예전에서도, 그리고 또 어디에 가서도 새로운 한국 고유의 찬양들을 부르고 있다. 특히 <아버지의 마음>이나 <신령과 진정으로>, 또는 <주의 장막에서>, <주의 나라가 임할 때>, <나는 자유해>같은 곡들은 정말 가슴에서부터  '정말 한국인의 감성에 맞는 곡들이 생겨나고 있구나!'라는 생각마저도 해본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가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45년 다시 우리나라가 회복되고, 50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의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히 커졌다. 당연히 다시 미국식 예배 형식이 다시 스며들어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노래를 지어부르기보다는 이미 있는 노래들을 부르는데 급했다. 이런 부분들에 상당한 이유를 제공했던 분들이 바로 존경하는 부흥사 목사님들이다. 맨날 부르는 곡이 '불길같은 성신여', '성령이여 강림하사'.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같은 노래들이였으니, 이런 노래들을 진짜 열심히 부르면서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급속히 그런 곡들, 즉 찬송가들에만 친숙해질 수 밖에 없다. 박정희 시대의 분위기도 한 몫했고, 엑스플로 '79 등의 성령운동 예배들도 거기서 거의 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예배자들은 새로운 곡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기 보다는, 외국(특히 미국)에서 주어진 곡들, 그리고 친숙한 곡들과 너무 유사한 곡들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80년대 찬양팀(주찬미라든가 등의)들이 다시 우리 감성에 맞는 우리 곡들을 만들었다가 (그런 곡들로 채워져 있는 것들이 아마 찬미예수 시리즈이지 않을까 싶다.) 8~90년대 경배와 찬양 운동이 일어나면서 (호산나! 인터그리티쪽 노래들에 의해) 다시 저지되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감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곡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사실 다른 나라의 노래들을 수입해오는데 힘써오지 않았는가? 이제 2000년대를 마감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다행히 이전보다는 많이 새로운 곡들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찬양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보를 들어야 하고, 그 신보의 곡 중 반 정도는 아직도 힐송이나 파라슈트 밴드, 또는 데릴리어스? 등에서 오는 곡들이 많다. 생각해보자. 이러한 곡들을 언제 다 따라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곡들을 왜 우리는 수입해서 불러야 하는가?

(우리 문화에 대한) 선입관 가운데 하나는 한국문화는 한국문화는 기독교와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나는 한국 전통문화를 무조건 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도대체 뿌리가 있는 민족인지 의심하곤 한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이 장고와 꽹과리에 맞추어 찬양 시간을 가졌는데, 장로님들과 어른들의 심한 꾸중 때문에 무기한 중단됐다는 말을 들었다. "귀신을 찬양하던 무속적인 악기를 사옹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 잔 하면서 두들기던 서양 기타나 드럼은 선하고, 우리 정서에 맞는 악기와 가락은 그 높은 예술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옛날 일 때문에 천덕꾸러기가 되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 나는 이제 '꽹과리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한국문화보다 서양문화를 선호하는 것도 문제이다. 앞에서 말한 포터 목사는 경주에서 서울까지 여행을 마치고 나서 "나는 내 고향 캘리포니아에 온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동네마다 서 있는 교회 건물이 자기 고향에 있는 뾰족탑 교회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부르는 찬송가도 지난 주일 자기 교회에서 불렀던 찬송가이고, 예배 순서도, 악기도 전부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 문화적 사대주의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성인경, <나의 세계관 뒤집기>, 홍성사. pp.172~4(재판)

 그러므로, 솔직히 사실을 인정하자면, 우리는 미국식 예배와 노래의 틀에 빠져있다. 찬양을 부르기 위해서는 피아노+신디, 일렉+베이스 기타 + 기타, 그리고 드럼과 찬양을 보조해줄 싱어가 필요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싱어 한명이 기타를 치던가, 피아노를 치던가 해야 (혼자 부르는 것 이외에는) 왠지 찬양 같은 찬양을 하고, 예배 같은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찬양은 왠지 미국에서 수입된 찬양과 한국의 몇몇 리더들이 만들어낸 곡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 밖에서의 틀의 곡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한 원하지 않는다. 은혜적인 기독교 문화의 틀 밖에 있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게 한국에 코드셋([ 1 ] [ 2 ]) 같은 밴드가 전혀 새로운 것 같이 느껴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7. 이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하면 괜찮을까 싶다. 하지만 결론을 내기 전에 몇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첫째는 24/7, 그리고 수금과 금대접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움직임 말이다. 정말 그들은 매일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예배를 들어가는 찬양을 부를 떄는 일반 곡들을 부르지만, IHOP 같은 데에서는 그렇게 예배를 부르면서 만든 음반들을 계속해서 CD로 만들어서 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곡들이 정말 하나님의 찬양을 넓게 퍼트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을까? 물론 내가 만들어내는 Spontaneous나 Harp and bowl형 노래들이 정말 내가 여기서 주창하고자 하는 노래의 스타일과는 가장 맞는다. 하지만 그 스타일이 아직도 미국형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Taize같이 조용한 노래들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참고 ]) 보통 찬양의 흐름을 감사 - 뜨거운 찬양 - 식히기 - 느리게 - 주님의 임재 안에 식으로 부르고, 또는 감사 - 번제단 - 물두멍 - 성소(성령 - 말씀 - 감사) - 지성소로 이어지는 성막식 예배도 있지만, 이런 틀 이외에도 조용히 주님을 찾는 예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뜨거운 찬양만 찾아왔다. 과거에 내가 찬양을 인도하고 있었을 때, 좀 빠른 찬양들도 해서 분위기를 높여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인도하실 때는 조용한 찬양들도 불러야 한다. 왜 우리는 깊이 침잠하려 하지 않는가, 고요히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찬양을 만들어내는 감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최근 우리 교회 찬양팀 사람들에게 하고 다녔던 말이 있다. "형도 찬양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앞으로도 주님께서 마음을 주신다면 그 말대로 사람들에게 권할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두 찬양 하나씩 만드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찬양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사명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왜 이렇게 이런 말을 강조했냐면, 남의 노래만을 부르는 교회에서, 즉 수동적인 환경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찬양을 만들어서 나누고 부르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정말 찬양의 배급(?)구조가 수직적이라는 것이다. 교회들과 교회들간에 좋은 찬양이 나누어지고, 불리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악성과 영성(?)을 일부 인정받은 교회와 선교단체가 찬양을 배급하면, 사람들이 와서 찬양 CD를 사가고, 찬양을 소비한다, 그 과정에서 저작권자들은 '정직'을 운운하면서 불법을 근절하고 돈을 불러모은다. 그리고 나온 수익금은 헌금으로 가던가, 또다시 새로운 찬양을 찍어내기 위해 쓰인다. 얼마나 이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잘 정착됐는지 가톨릭 생활성가 가수들이 우리를 부러워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진정한 방법인가?[각주:3]

8.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첫째로, 이제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가 나와야 한다. 맨날 부르는 곡 또 부르고 새로운 곡 어디서 찾아와서 도입하고가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만들어서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나와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Spontaneous 적 방법이나 국악 찬송적 방법, 그리고 시나위 같은 방식을 도입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당장 전통적 방식을 모든 교회에 적용할 수 없으며, 이런 말을 쓰고 있는 나도 그런 찬양을 약간은 어색해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서양식 방법으로라도 남의 노래가 아닌 우리의 노래를 일궈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서 세워지고 발전되어야 하며 우리의 신앙고백과 찬양이 우리 자신의 짓과, 음과, 선과, 멋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 기독교대한복음교회, 77 신앙선언문 4항 중

 둘째로, 한국 찬양 사역자들이 저작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 바란다. 특히 이러한 시스템을 만든 Copycare는 분명히 한국교회 앞에서 반성해야 한다. 물론 정당한 가격에 정당하게 구매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그리고 CD를 판매하는 것도 주님께서 찬양사역들에 재정을 공급하시고, 찬양을 보급하는 방법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저작권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 세계에서 저작권이 생긴지도 기껏해야 400년이 넘지 않았고 (1700년대 이야기니까), 지금까지 사후 50년이니 70년이니 한건 100년도 안됐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저작권을 소유로 허락하고 인정하시는지 생각해 봐야 할 판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마저 돈을 팔고 주고 산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이 없는가?

 특히 자유저작권에 대해 잘 모르시는 사역자들이 많다. 초대교회를 따라 물건도 재정도 주고 받고 한다면, 거기에 더해 자신의 works도 주고 받고 하면 안되나? 물건을 팔아서 재정을 취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통로이어야지, 그 통로를 하나님의 찬양을 퍼트리는 것에 우선해서는 안된다.

 셋째로, 교회 안에 찬양을 만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찬양이 퍼져서 찬양이 나오는 배급 통로와 유통로가 다양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찬양을 만드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일반인들에게는 왠지 찬양사역자라고 하면 그 사람들만 찬양을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우리는 그들의 찬양을 따라 불러야 할 것 같은 계급 의식이 있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을 믿는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제사장이라면, 우리도 찬양을 만들어 부를 권리가 있고, 나누어줄 권리가 있다. 특히 현재 오프라인 우선으로 돌아가는 (작곡 -> CD녹음 -> 판매 -> 찬양집 수록) 찬양의 배급 체계는 반드시 온라인 중심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드디어 쓰고 싶었던 찬양에 대해서 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우리 찬양팀이 미덥잖은 점이 있었다. 1년전에는 캠워 6집 노래 부르고, 올해는 마커스 라이브 부르고, 정작 우리가 불렀던 우리 노래는 목사님의 노래밖에 없었다. 이젠 이러한 분위기가 왜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왜 개선해야 하는지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도전하며, 이 글을 우리 찬양팀, 그리고 오늘도 새로운 찬양을 찾아다니고 있을 전국의 많은 찬양팀에 바친다.


- 2009, earpile

  1. 그래서 심형진 간사님이 항상 예배에 대해 가르칠 때 '삶의 예배'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예배의 기술이나 방법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 정말 예배의 마음은 꾸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예배사역을 해봤다는 팀 모두의 음반수가 10집을 넘어가지 않는 이상한, 보이지 않는 징크스가 있다. 올네이션스의 <전하세 예수>의 예외를(13집까지 갔다) 제외하면, 예수전도단 오리지널 음반도 10집에서 멈췄고, 다윗의 장막도 10집에서 멈췄으며, 박종호 같은 기라성 같은 사역자도 10집을 넘지 못했다. 물론 이 모든 사역들이 옆으로 다른 레이블을 만들긴 한다. 하지만 10집에서 뭔가 사역을 정리하는 이런 분위기는 앞으로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3. 한국 찬양 저작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매우 자세히 논할 것이다. 사실은 이 부분에 대해 오래 전부터 쓸 생각이 있었는데, 전혀 글이 나오지 않아 공개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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