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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맛

국화를 먹는 법

중양절에 마시는 향기로운 묘약

흔히 국화라 하면 진(晉)의 은자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히 전원으로 물러나 살면서 쓴 <술을 마시고서(飮酒)>라는 시에서 읊은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 따다가, 유연히 남쪽을 바라보노라(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한 구절을 떠올린다. 국화는 도연명으로 인하여 은일(隱逸)의 상징이 되었다. 또 국화를 두고 도연명은 서리 속의 호걸 상하걸〔霜下傑〕이라 하였고, 소동파(蘇東坡)는 서리 속의 영웅 상중영〔霜中英〕이라 하였으니 국화에는 꼿꼿한 선비의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는 별칭까지 더해졌다.

국화의 나라

운수평(惲壽平, 1633∼1690), <국화도(菊花圖)>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조선 후기에도 백색, 홍색, 황색 등 세 가지 색깔의 국화를 화분에 길러 감상하였다.

조선은 가히 ‘국화의 나라’라 할 만하다. 조선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한 가지에 피는 삼색국(三色菊), 오색국(五色菊)이 있었다. 강이천(姜彝天, 1768~1801)의 증언에 따르면 김노인이라는 사람이 국화 재배에 경이로운 솜씨를 발휘했다. 그는 꽃을 일찍 피우게도 늦게 피우게도 하였고, 꽃의 크기를 손톱처럼 작게도 만들었다. 큰 키에 큰 꽃이 피는 품종도 만들어냈으며, 옻칠한 듯 검은 꽃을 피워내는가 하면, 가지 하나에 여러 빛깔의 꽃이 섞여 피어나게도 했다 한다.

국화는 품종 자체도 매우 다채로웠는데, 몇몇 품종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순백색의 큰 꽃이 피어 옥매(玉梅)라고도 하는 신라국(新羅菊), 범 가죽처럼 황색과 적색이 섞여 있는 고려국(高麗菊)처럼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품종이 널리 알려졌다. 또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돌아올 때 오홍(烏紅), 연경황(燕京黃), 연경백(燕京白), 규심(閨深), 금홍(錦紅), 은홍(銀紅), 학정홍(鶴頂紅), 소설오(笑雪烏) 등 현란한 이름의 국화를 선물로 받아와 조선 초기 정원을 빛내었다. 소중양절인 5월 9일에 즐기던 황색의 왜황(倭黃)이 유행하였거니와, 심능숙(沈能淑, 1782∼1840)은 1834년 커다란 흰 꽃이 피고 향기가 아름다운 백운타(白雲朶)라는 일본 꽃을 구해와 국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비슷한 시기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시에는 “근일에 서양 국화가 중국에 들어온 것만 쳐도 백 수십 종이 된다”고 하였고,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이 [양국보(洋菊譜)]를 편찬한 것을 보면 중국에 들어온 서양 국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김정희의 다른 시에 “163종이나 되는 품종이 많기도 하건만 끝내 학령이 여러 국화 중에 첫째라네”라 한 대로 당시 조선의 정원에는 160종이 넘는 국화가 재배되었다.

국화를 마시다

우지정(禹之鼎, 1647∼1709),<왕원기예국도(王原祁藝菊圖)>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화분에 여러 가지 색깔의 다양한 국화를 키우는 것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화려한 국화는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고 향기를 즐기기 위한 것이었지만, 국화는 눈과 코를 넘어 입을 즐겁게 하고 몸을 튼튼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따르면 국화는 몸을 경쾌하게 하고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하며 머리와 눈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선비들은 국화를 차로 끓여 먹거나 술로 담가 마셨다. 신위(申緯, 1769∼1845)에게도 국화로 담근 술은 몸을 가뿐하게 하는 묘약이었다. 이때의 국화는 식용의 감국(甘菊)이다.

사람들 오래 살고 싶은 소원 있어                                 有願人人壽命長
이날 은근히 서로 권하여 마신다네.                              殷勤相屬此時觴
술은 신선처럼 몸을 가볍게 하는데                               神仙輕體杯中用
국화꽃 향기가 햇살 아래 풍겨나네.                              黃菊花香禀正陽


- 신위,<중양절 하상(荷裳) 등 여러 사람이 반분로(潘邠老)의 “성 가득 비바람에 중양절이 가깝네”라는 시구로 운을 삼아 각기 시 7수를 얻다(滿城風雨近重陽爲韻, 各得詩七首)>,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22책

한나라 때 비장방(費長房)이 환경(桓景)에게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집에 재앙이 있을 것이니,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붉은 주머니에 붉은 산수유 열매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국화주를 마시게 하면 재앙을 면할 것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는 풍속이 생겼다. 국화주는 액운을 피하게 할 뿐만 아니라 몸을 가뿐하게 하고 수명까지 늘려준다 하니 더욱 좋다. 마침 따스한 햇살 아래 활짝 핀 국화가 향기를 뿜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있으랴? 그러니 잔에 든 것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신선의 음식인 것이다.

조선시대 널리 읽힌 원나라 때의 책 [거가필용사류전집(居家必用事類全集)]에는 국화주를 담그는 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러하다. 9월 감국이 흐드러지게 피면 향이 좋고 맛이 단 노란 꽃잎을 따서 햇볕에 바싹 말린 다음, 청주 한 말에 손가락 길이 정도의 높이로 국화꽃 두 냥을 명주 주머니에 넣어 걸어 두고 병 주둥이를 밀봉한다. 이렇게 하여 하루를 묵힌 후 명주 주머니를 제거하고 술을 마시면 국화의 향이 우러나고 맛도 달다.

정선(鄭敾), <동리채국도(東離採菊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연명이 중양절에 국화꽃을 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국화는 좋지만 술이 싫다면 차로 끓여 마시면 된다.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따르면 반쯤 핀 감국을 따서 푸른 꽃받침 껍질을 긁어내고 샘물에 넣어 끓인 다음 꿀에 타서 마시면 맛이 좋다고 한다. 또 국화가 이미 활짝 핀 것은 꽃받침을 제거하고 꿀을 발라 촉촉하게 하여 녹말가루에 굴린 다음, 잠깐 끓는 물에 넣었다 건져서 꿀물에 타고 잣을 띄워 마신다고 하였다. 국화는 구기자와 섞어 차를 끓이기도 하는데 이를 기국차(杞菊茶)라 한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감국 1냥, 구기자 4냥, 차의 싹 5냥, 참깨 반 근을 함께 곱게 갈아 체로 거른 다음, 소금과 들기름을 조금 넣어 한 번 끓인 물에 타서 마신다고 하였다.

국화는 약용으로 먹기도 했다. [산림경제]에 “감국은 정월에 뿌리를 캐고 3월에 잎을 따며 5월에 줄기를 따고 9월에 꽃을 따는데 모두 응달에 말린다. 네 가지 맛을 내는 약재를 함께 천 번 빻아 가루로 만들고 술에 한 돈씩 넣어 먹거나 꿀에다 오동 열매 크기의 환으로 만들어 일곱 개씩 하루 세 번 먹는다”라 되어 있다. 이렇게 따라 하면 될 듯하다.

감국으로 만든 음식

먹을 수 있는 국화 감국. 식용의 국화는 그 맛이 달다 하여 감국(甘菊)이라고 하고, 진짜 국화라는 의미로 진국(眞菊)이라고도 했다. 감국은 단엽의 조그마한 꽃잎이 부드러우면서 줄기는 약간 붉은빛을 띤다. 음력 9월 그믐에 피어 10월에 만개한다. <출처: (cc) KENPEI at zh.wikipedia.org>

다만 아무 국화나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굴원(屈原)이 [초사(楚辭)]에서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고 했을 때의 국화는 감국(甘菊)이다. 식용의 국화는 보통 맛이 달다 하여 감국이라 하고, 진짜 국화라 하여 진국(眞菊)이라고도 한다. 가국(家菊), 다국(茶菊), 강성황(江城黃)이라고도 불린다. 감국은 꽃잎이 단엽으로 조그마하고 두꺼우면서도 부드러우며, 줄기는 붉은빛을 띤다. 또 국화의 여러 품종 중에 가장 늦게 피어 최만황(最晩黃)이라고도 불린다. 그 색은 황금처럼 순황색이며 음력 9월 그믐에 비로소 피어서 10월에 만개한다고 한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따르면 국화는 크게 두 종이 있는데 줄기가 붉고 냄새가 향긋하며 맛이 단 것은 그 잎을 죽으로 만들 수 있지만, 줄기가 푸른 것은 맛이 써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먹을 수 없는 것은 구분하여 흔히 쑥부쟁이라 한다.

감국이라야 그 싹으로 죽을 쑤거나 찌개를 끓일 때 잎을 넣기도 하고, 여린 잎으로 나물을 무쳐 먹을 수 있다. 이옥(李鈺, 1760∼1815)은 [백운필(白雲筆)]에서 국화를 두고 “봄에는 그 싹을 먹어 나물로 삼고, 여름에는 그 잎을 먹어 생선찌개에 넣고, 가을에는 그 꽃을 먹어 술잔에 띄우거나 떡에 버무린다. 그 쓰임이 꽃을 보거나 향기를 맡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라 하였다. 국화의 잎은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하고 매운탕에 넣어 먹기도 하며, 꽃은 떡으로 쪄서 먹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傳) 김홍도(金弘道), <풍속도병(風俗圖屛)> 프랑스 파리 기메 미술관 소장. 여러 색깔의 국화 화분 곁에 사람들이 모여 놀이를 하고 있다. 문 곁에는 괴석과 석류나무, 국화꽃이 보인다.

국화잎으로 무친 나물은 지금도 별미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국화 나물을 예전에는 황화채(黃花菜)라 불렀다. 황화채는 광채(廣菜)라고도 하고 우리말로는 업나물이라 하였다. 업나물은 원래 원추리로 만든 나물을 가리키는 말인데, 국화 나물을 가리키는 말로도 혼용됐다. 허균(許筠, 1569∼1618)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의주 사람들이 중국인에게 배워 맛있게 조리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중국에서 들어온 요리인 듯하다. [산림경제]에도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일기를 인용하여 통판(通判)을 지낸 군영(君榮)이라는 중국인이 이 나물을 만들어 먹었다 하였다. 또 그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6~7월 만개한 원추리의 꽃을 따서 꽃술을 제거하고 깨끗한 물에 데쳐 초를 쳐서 먹는다고 하였다. 입에 넣으면 맛이 신선의 음식 같아 보드랍고 담박하여 송이보다 나아 나물 중에서 으뜸이라 하였다.

황화채, 곧 업나물은 국화의 잎으로도 만들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가을의 별미로 황화채를 들고, 이를 만드는 법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그 방법은 이러하다. 가을에 감국의 꽃을 따서 꽃받침과 꽃술을 제거한 다음 나무로 된 소반에 늘어놓고, 깨끗한 물로 살짝 씻은 다음 송엽주(松葉酒)를 이슬이 묻은 듯 살짝 적시고 녹두 가루를 꽃잎 위에 뿌려 바른다. 이것을 냄비에 물을 붓고 약하게 끓인 물에 데쳐서 건져내는데 이때 덩어리가 지지 않도록 한다. 다시 꽃잎을 하나하나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어 식초를 타고 맛을 내는 여러 재료를 섞어 먹는다. 이규경은 원추리꽃, 아욱잎, 연꽃, 수박꽃, 당귀잎 등도 같은 방식으로 먹는데 이는 승려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 하였다.

국화꽃으로 만든 국화전(菊花煎)도 인기 있는 음식이었다. 국전(菊煎), 국병(菊餠), 국고(菊餻)라고도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늦가을 감국을 채취하여 꽃받침과 꽃술을 제거한 다음, 물을 뿌려 축축하게 하고 쌀가루를 묻혀 전을 붙이면 된다고 하였다. 이때 꽃잎이 뭉치지 않도록 해야 모양이 곱다. 꿀에 담갔다 꺼내어 말려두었다가 겨울이나 봄, 여름까지도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도문대작]에는 한양에서 봄에는 두견화전(杜鵑花煎)과 이화전(梨花煎)을, 여름에는 장미전(薔薇煎), 가을에는 국화병(菊花餠)을 먹었다 하니, 국화꽃뿐만 아니라 진달래꽃, 배꽃, 장미꽃도 모두 전으로 부쳐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노릇노릇하게 지져낸 국화전은 중양절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인기가 있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국화주는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의 세시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출처: 한국전통주연구소>

특히 국화전은 중양절의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18세기 남인을 대표하는 문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명덕동기(明德洞記)>에서 가족들과 야외로 소풍을 다녀온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3월 삼짇날이나 9월 중양절이면 바람이 자고 날씨가 따스한 날을 골라 집안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솥을 가지고 가서 벼랑의 바위에 앉히고, 돌 틈의 들꽃이나 국화를 꺾어 전을 만들어 먹고 쑥국을 끓여 반찬으로 삼았다. 희희낙락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거움이 끝이 없었다.

삼짇날의 쑥국과 중양절의 국화전은 가장 인기 있는 별미였던 것이다. 중양절이 되어도 절기가 늦어 국화가 피지 않아 꽃이 없으면 잎으로도 국화떡을 만들어 먹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자신의 집에서는 그렇게 먹는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화의 이러한 효능을 잘 알았기에 술에 띄울 뿐만 아니라 아예 국화를 말려 베갯속으로 삼은 예가 있었다. 18세기 문인 유언호(兪彥鎬, 1730∼1796)가 그렇게 했다. 유언호는<국침명(菊枕銘)>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이에 따르면 유언호의 백형이 묘향산에 갔다가 산국(山菊) 몇 되를 가지고 와서 베로 감싸 베개를 만들어 사용하였더니 국화향이 은은하게 코에 어렸다고 한다. 물론 선비의 고고한 정신까지 은근히 깃들인 것이니 더욱 멋이 있었으리라. [산림경제]에는 가을에 감국을 따서 붉은 베로 만든 자루에 넣어 베개를 만들면 머리와 눈을 시원하게 한다고 되어 있으니 이 비방을 따른 것이다. 어떤가? 따라 해보고 싶지 않은가!

 

'18세기의 맛'은 한국18세기학회의 기획으로서, 문학동네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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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12. 11. 06.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한국18세기의 학회의 첫 프로젝트 결과물, <18세기의 맛>이 책으로 나왔다.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했다. 23명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18세기의 동서양을 뒤흔든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는 일에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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