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추석엔 정규직 사원이고 싶다

2010. 9. 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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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특집2] 같은 일을 하며 처우는 모두 절반인 하청 노동자…

"사내 하청은 불법 파견" 대법원 판결에도 정규직화는 여전히 머나먼 꿈인가

 자동차 관련 뉴스가 나오면, 칠순의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뜬다. 새 차가 나왔는지, 수출은 잘되는지 살펴본다. 참외로 유명한 경북 성주에서 아버지는 혼자 지낸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참외 농사를 접었다. 추석이 오면, 외아들 박기호(31·가명)씨는 혼자 텔레비전만 보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할 것이다. "마카 내가 보태줘야 하는데. 몬 도와줘서 미안하대이." 걱정인지 희망인지 모를 말도 덧붙일 것이다. "퍼뜩 정식 사원이 돼야 집이라도 장만할 낀데."  

임금은 반토막, 해고는 1순위

 아들 걱정에 하루를 보내는 아버지를 만나러 박씨는 울산에서 경북 성주까지 승용차를 몰고 간다. GM대우가 만든 라노스다. 장인이 타던 것을 건네받았다. 박씨는 52초마다 한 대씩, 하루 600여 대의 현대자동차에 타이어를 단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차체가 이동해 박씨 앞에 멈춘다. 손으로 타이어의 아귀를 맞추고, '임팩트'라 부르는 공구로 너트와 볼트를 조인다. 제 손을 거쳐가는 수많은 승용차 가운데 박씨의 것은 없다. 아버지가 '정식 사원'이라 부르는 원청 정규직이 된다면, 근속연수에 따라 현대차를 싸게 살 수 있다. 20년차 정규직이라면, 그랜저를 살 때 클릭 가격만큼 할인받는다. 정규직이 누리는 재미다. 박씨에겐 그런 재미가 없다. 4만여 명이 일하는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박씨는 현대차 직원이 아니다.

 울산 공장은 '7 대 3'의 세계다. 열에 일곱은 현대자동차에서 월급을 받는 정규직이다. 나머지 셋은 하청업체에 고용돼 있다. 현대차가 '원청'이 돼, 특정 공정을 외부 업체에 '하청'을 준다. 박씨는 하청업체에서 월급을 받는다.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는 직접 고용된 2만8천~3만 명의 정규직이 있다. 현대자동차와 도급계약을 맺은 하청업체 소속 직원이 6천여 명, 이 도급업체들이 다시 하청을 준 2·3차 하청업체 소속 직원이 4천여 명이다. 이들 모두 울산 공장의 같은 지붕 아래 나란히 똑같은 일을 한다.

 공장 밖 울산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안다. 이 고을에선 '자동차 사람'과 '부품 사람'을 구분한다. "(현대)자동차에서 일한다" 하면, "오호, 돈 많이 버시겠네요" 부러워한다. "(현대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한다" 하면, "아휴, 고생 많으시겠네요" 걱정한다. 7~9년차 현대차 정규직은 연간 6천만~7천만원 정도 번다. 비슷한 연배의 하청업체 직원은 3천만원 정도 번다. "뭐든지 절반이라고 보시면 돼요." 노란 봉투에서 월급명세서를 꺼내며 박씨가 말했다.

 지난 5월, 박씨는 월급 129만640원을 받았다. 5월에는 상여금이 없었다. 90만원의 상여금은 격월로 나온다. "평달에는 카드로 막고 상여금 나오는 달에 그걸 메우지요." 하청업체 7년차인 그는 전세 6500만원짜리 24평 아파트에 산다. 아내는 집에서 어린 두 딸을 돌본다. 갓 서너 살을 넘긴 두 딸은 천진하게 먹고 싸며 자란다. 그 입을 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저축할 여유도 없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이라도 따볼까, 박씨의 아내는 고민 중이다.

 반토막 임금보다 더 큰 고통이 5년마다 찾아온다. 평균 5년마다 새 자동차가 출시된다. 기존 작업 라인에 변화가 생긴다. 공정이 통째로 사라지거나, 필요 인원이 줄어든다. "절대로 정규직은 자르지 않아요. 하청 직원만 쫓겨나지요." 박씨는 그게 제일 분하다. 정규직이 맡았던 공정이 없어지면, 꼭 필요한 공정에서 멀쩡히 일하는 하청 직원이 쫓겨난다. 하청 직원 자리에 원청 직원이 옮겨와 계속 일한다.

 2008년 5월 노동부 통계를 보면, 300명 이상 사업장의 사내 하청 노동자는 36만7천 명이 넘는다. 2009년 2월 현재, 300명 이상 대형 사업장 종사자는 155만7천여 명이다. 대공장 노동자의 24% 정도가 도급·용역 업체에 소속된 하청 노동자인 셈이다. 이는 빙산의 일각이다. 5~300명이 일하는 중소 사업장 종사자는 657만1천여 명에 이른다. 작은 사업장에선 대부분 파견·용역업체 소속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그 수가 100만 명일 수도 600만 명일 수도 있지만, 아직 정확한 실태를 조사한 적은 없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내 하청 노동자는 세상 관심의 사각지대에 있다.

 그 수는 정확하지 않아도, 파견·용역업체를 거치지 않고선 취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농사를 짓는다면 모를까, 2차(제조업)·3차(서비스업) 산업의 고용은 이미 파견·용역업체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

 조미려(24·가명)씨는 지난 3월부터 경기도 안산 ㅇ화장품 매장에서 일했다. 제법 유명한 화장품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한다기에 원서를 냈다. 본사 건물에서 본사 간부가 면접을 봤다. 생기 있는 얼굴과 구김살 없는 목소리의 조씨는 착실히 일해 장차 매장 매니저가 되고 싶었다. 며칠 뒤, 기다리던 합격 통보 전화를 받았다.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본사 직원과 똑같아요. 우리가 (인력) 관리한다는 것만 다르죠." '팀장'이라는 그 남자는 조씨에게 "아무 차이가 없다"고 거듭 말했다.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 경험을 빼면 사실상 첫 직장이었으므로, 조씨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정규직·비정규직, 원청·하청,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조씨는 별 의심 없이 매일 아침 20분씩 공들여 화장을 하고 출근했다.

 "차이가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지난 7월, 조씨는 127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함께 일하는 매니저 언니가 월급명세서를 보더니 "이상하다"고 말했다. 월급 항목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알고 보니, 조씨는 용역업체에 고용돼 매장에 파견된 상태였다. 같은 매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다른 월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곁에 있는 직원들도 까맣게 몰랐다.

임금 인상 요구 뒤 파견 노동자 고용 늘어

 조씨와 함께 일하는 권진숙(35·가명)씨는 본사가 직접 고용한 정규직이다. 10년차 권씨는 한 달에 150만원을 받는다. 최저임금 수준이다. 지난해 가을, 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졌다.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그 직후부터 정규직이 비는 자리에 파견업체 직원들이 나와 일하고 있다"고 권씨는 말했다. 150만원을 받는 원청 직원 권씨와 120만원을 받는 하청 직원 조씨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하다.

 회사가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고, 도급·용역업체를 통해 간접고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낮은 임금을 유지하고, 해고를 손쉽게 하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노동유연화의 하나로 간접고용이 본격화됐다. 1998년 '파견법'이 만들어지면서 노동력의 중간 거래가 확산됐다. 2009년 상반기 노동부 통계를 보면, 등록된 인력 파견업체만 1367곳이다. 저임 노동자를 중개하는 미등록·무허가 인력업체의 규모는 아예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일이 어떤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최혜령(34·가명)씨는 몸으로 겪어 잘 안다. 그는 구로 '서울 디지털단지'에서 일한다. 지난 2002년부터 9년여간 이곳의 공장을 전전했다. 카오디오, 휴대전화 스피커, 디지털 도어록, 방범카메라 등을 만드는 작은 공장을 두루 거쳤다.

 지난 3월부터는 온도센서를 만들고 있다. 에어컨·냉장고·보일러 등에 쓰인다. 2~3cm의 소자를 납땜으로 전선에 이어붙이는 게 그의 일이다. 하나 붙이는 데 3초가 걸린다. 하루 7천~8천 개를 만든다. 20명이 일하는 지하 공장에는 톨루엔·알코올·에탄올·에폭시, 그리고 납땜 냄새가 가득하다. 냄새를 피하겠다고 마스크를 쓰는 사람은 없다. 쓰라고 권하는 사람도 없다. 제품을 말리는 건조기에서 100~120도의 열기가 뻗친다. 낡은 에어컨을 틀어도 공장은 너무 덥다. "더운 건 참을 수 있는데, 약품 냄새 때문에 속이 쓰리고 눈이 시려요." 지난 6개월 동안 15명이 공장 일을 그만뒀다. 하루 만에 그만두는 사람도 있었다. 덥고 냄새나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최씨는 지난 8월, 12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그나마 잔업을 해서 그렇다. 물량이 없어 잔업·특근을 못했던 지난봄에는 90만원씩 받았다.

 이런 일자리를 최씨는 용역업체를 통해 구했다. 인터넷에서 일자리를 구하다 ㄱ회사의 채용 공고를 봤다. 전자조립, 급여 140만원, 8시간 근무…. "140만원에 마음이 동했다"고 최씨는 말했다. 서울 구로에서 그런 월급을 주는 공장은 드물다. 매일 밤 잔업을 하고, 매 주말 특근을 해야 그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전화를 걸었더니 용역업체였다. 용역업체 직원은 전화로 최씨의 이력을 물었다. 구로역 3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했다. 용역 직원이 모는 승용차를 타고 ㄱ회사 사무실로 갔다. ㄱ사의 부장이 면접을 봤다.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했다. "어디서 일했어요? 손은 빠른가요?" 몇 마디 묻더니, 면접 자리에 나온 8명 가운데 4명을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씨, △△△씨…. 이분들 말고는 나가주세요." 갓난아기를 뒀거나, 나이가 많거나, 둔해 보이면 뽑지 않았다.

 최씨가 지금까지 일한 구로 '서울 디지털 단지'의 대부분 공장에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채용했다. 본사 명의로 채용 공고를 낸다. 모집은 용역업체가 한다. 채용은 본사가 결정한다. 작업 지시도 본사 직원이 한다. 그러나 월급은 용역업체가 준다.  

"2년 이상 근무 하청 노동자는 정규직 간주"

 2009년 한국산업단지공단 자료를 보면, 구로 '서울 디지털 단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12만3천여 명에 이른다. 여기에 입주한 사업장은 7437곳이다. 1개 사업장마다 평균 16~17명이 일하는 셈이다. 전형적인 소규모 사업장인데, 절대다수가 용역업체를 통해 노동자를 간접고용하고 있다. '국가산업단지'는 구로 외에도 시화·남동·반월·창원·구미·부평 등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2009년 4월 현재, 이 단지들에 입주한 사업장은 3만6500여 개다. 사업장마다 평균 15명씩을 고용한다면, 적어도 52만여 명이 산업단지의 중소 사업장에서 일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절대다수가 최씨처럼 용역업체에 의해 파견돼 공장을 전전하는 간접고용 노동자다.

 최저임금과 고용불안, 그리고 불법파견의 쳇바퀴를 그들은 왜 인내하는 것일까? "그래도 구로에 있으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거든요. 다른 데 가면 취업 자체가 힘들어요. 서울 근처 구직자들은 전부 이곳으로 와요." 최씨는 2008년 10월, 영세민 자격으로 2천만원의 전세자금을 대출받아 3천만원짜리 셋집을 구했다. 그전에는 다달이 10만~20만원씩 내는 월세방에 살았다. "월급이 적으니 한 달에 15만원씩 나가는 월세 부담이 너무 컸거든요." 최씨의 꿈은 정착할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다. 잔업과 특근은 얼마든지 견뎌낼 준비가 돼 있다. "정규직이고, 상여금만 있으면 돼요." 그런 일자리가 최씨 주변에는 없다.

 기댈 만한 곳 없는 이들에게 최근 희소식이 생겼다. 지난 7월22일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 하청이 불법 파견이고, 2년 이상 근무한 하청 노동자는 현대차에 정규직으로 고용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현행법상 제조업 생산공정에는 파견 노동이 금지돼 있다. 파견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일이고, 도급은 물품을 납품하는 일이다. 기업들은 이 법을 피하려고 인력업체와 '도급' 계약을 맺은 뒤, 실제로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파견'을 해왔다. 노동계에서는 이를 불법 파견이라 보고 그 철폐를 주장해왔다(상자 기사 참조). 민주노총 법률원 권두섭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사내 하청'이라는 독특한 고용방식을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그것이 명백한 불법파견이라고 결정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노조무풍 지대에 부는 하청 노동자 해고 바람 

 이에 따라 인력업체 소속으로 2년 이상 파견 근무한 제조업 비정규 노동자들은 일련의 소송을 통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울산 현대차 공장의 경우, 600여명이었던 비정규지회 노조원이 판결 이후 한달 만에 1800여명으로 늘었다.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정규직 고용 요구를 본격화한 것이다. 민주노총은 울산 현대차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제조업 사업장 비정규직들의 정규직화를 향후 집중 사업으로 잡고 있다. 노동계에선 제조업에서 불법 파견이 철폐되면, 뒤를 이어 서비스업·건설업 등으로 그 영향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포스코 전남 광양 공장에서 일하는 50대 초반의 양동운(51)씨도 같은 꿈을 갖고 있다. 그는 1987년 12월부터 광양제철소에서 일했다. 벌겋게 달궈진 철판을 둥글게 말아 '코일'로 만드는 압연 공장에서 일한다. 크레인에 올라탄 양씨는 최대 35t씩 나가는 코일을 하루 230개씩 옮긴다. 1986년에 공장 가동이 시작됐으니, 양씨의 삶 자체가 광양 포스코다. 그래도 그는 포스코 직원이 아니다. 회사는 '외부 협력업체'라 부르고, 양씨는 '하청업체'라 부르는 용역업체 소속이다.

 정규직 대접을 받고 싶은 그 역시 대법원 판결에서 희망을 본다. 그러나 판결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현대차는 원청 노조가 강력하고 노조 차원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관심도 많으니까, 사내 하청 노동자도 제 목소리를 내거든요. 포스코의 사정은 정말 다르죠." 광양 포스코 원청 직원 6300여 명 가운데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22명뿐이다. 사실상 '노조무풍'지대다. 노조의 힘 없이 어마어마한 대기업 원청과 맞서는 일은 양씨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

 포스코 광양 공장에는 본사에 소속된 직원 6300여 명과 용역업체 소속의 1만1천여 명이 일한다. 현대자동차와 달리 하청 직원이 더 많다. 현대자동차와 다른 점이 또 있다. 원청 직원과 하청 직원의 일이 조금 다르다. 설비를 조작하는 '운전실'에서 원청 직원이 일한다. 반면 하청 직원은 작업 라인에서 일한다. 작업 지시는 운전실의 원청 직원이 컴퓨터에 입력하고, 하청 직원은 그에 따라 일한다. 가끔 원청의 주임이 하청 반장에게 추가 지시를 내린다. 하청 반장의 안전모에는 '대리인'이라 적혀 있다. 포스코 광양 공장은 원청 직원이 하청 직원을 일일이 지휘하는 대신 '간접 지휘'를 택한 것이다.

 이런 노무관리가 작동하는 이면에는 용역업체의 간부들이 있다. 포스코에도 구조조정이 있다. 간부들의 명예퇴직도 가끔 이뤄진다. 그들은 사내 하청을 관리하는 협력업체의 간부로 옮겨간다. "보통 5년마다 한 번씩 이른바 '외부 협력업체'의 사장이 바뀌지요. 그동안 3번 바뀌었는데, 모두 포스코 부장 출신이었어요." 해고 위협은 하청 노동자에게 집중된다. "지난해 3월, 원래 3개 하청업체가 맡았던 공정을 1개 하청업체에 몰아줬어요. 26명이 하던 일을 지금은 18명이 하고 있지요." 간부가 아니라 해도 원청 생산직 역시 퇴직 뒤엔 용역업체 중간 관리자로 들어간다. 하청 직원이 퇴직하면? "뭐, 갈 곳이 없지요. 아파트 경비 자리도 없어서 못하니까…."  

청춘 바친 20년, 월급 아직 204만원

 20여 년을 일한 양씨는 지난 5월, 204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격월로 나오는 상여금은 90만원 정도다. 양씨보다 10년 뒤에 들어온 포스코 생산직의 정규사원은 같은 달에 246만여원을 받았다. 상여금과 성과급을 더하면 원청 정규직 10년차의 연봉은 7천만원이 넘는다. 양씨의 아내는 평생 식당 일을 했다. 아내가 벌어오는 돈을 더해 세 딸을 길렀다. 늦둥이 막내딸이 아직 초등학생이다. 첫째·둘째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막내딸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돈을 더 벌어야 한다. 그런 것도 모르고 세월은 무심히 흘러, 55살의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스물을 갓 넘긴 청춘의 시절, 전남 순천에서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일터에 다니던 때가 아득하다. "거시기, 출퇴근 허기도 어려불틴디…. 징허게 고상혔다." 장남의 첫 월급을 받아들고 박씨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 아버지는 이제 돌아가 누우셨다. 추석이 되면 양씨는 고향 순천 가족 납골묘에 모신 아버지를 찾아갈 것이다. 고생스러운 이야기는 가슴에만 담고, 아버지한테 술 한 잔 부어 올릴 것이다.

파견 근로 확대 꾀하는 이명박 정부

대법원 판결도 무력화될라

 근로자파견제는 1998년 정리해고제와 함께 등장했다. 인력업체에 고용된 파견 노동자는 사용업체로부터 작업 지휘를 받는다. 이를 민법상 '용역(계약)'이라 부른다. '파견법' 제정 당시에는 노동자의 권리침해를 우려해 사용 기간을 2년 이내로 정하고, 파견 가능 업종도 26개 보조 업무로 제한했다. 특히 제조업의 직접생산 공정 업무에는 파견을 일절 금지했다.

 이 때문에 대다수 사업장에서는 용역계약이 아닌 도급계약을 맺어 법망을 피해가고 있다. 민법상 도급은 "어느 일을 완성할 것을 약정하고, 그 결과에 대해 보수를 지급하는 계약"이다. 부품을 완성해 납품하면 대가를 지급하는 식이다. 도급업체는 같은 내용의 계약을 또 다른 업체와 맺을 수 있다. 2·3차 하청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도급은 파견법 제정 이전부터 건설업·제조업 분야에 퍼져 있었다.

 보통의 도급계약은 하청업체의 공장에서 완성품을 만들어 원청업체에 납품하지만,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사내 하청'은 하청 소속 노동자들이 원청 공장에 가서 그 생산시설을 이용해 일을 하는 방식이다. 도급 노동은 원청이 아닌 하청업체의 지휘·명령을 받아야 하지만, 사내 하청에서는 원청업체가 직접 작업 지시를 내린다. 계약상 (합법적) '도급'이지만, 실제는 (불법) '파견'인 셈이다. 현행 파견법의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방식을 통해 제조업의 직접 생산공정 업무에 비정규직을 장기간 투입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2010년 7월22일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 하청은 불법 파견"이라는 판결을 내려, 이런 악폐에 경종을 울렸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의 이상호 연구위원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하는' 다른 제조업 사내 하청 노동자들도 이번 판결의 직접적인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자동차·조선·전자·철강 등 금속 제조업의 사내 하청 노동자만 10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관리직만 정규직이고, 생산직은 모두 사내하청 방식의 파견 비정규직으로 채워진 대공장들도 적지 않다. 기아차 모닝을 생산하는 동희오토의 경우, 950명의 생산직 모두 17개 사내하청에 소속된 비정규직인데, 이번 대법원 판결로 정규직 전환의 꿈을 갖게 된 것이다.

 정규직 전환 비용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의 조사를 보면 열쇠는 경영진이 쥐고 있다. "4년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봉은 약 1172만8260원 차이가 난다. 1만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매년 1173억원의 인건비가 추가로 든다. 그런데 매년 2조5천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리는 현대자동차의 경우, 이익의 5%만 부담하면 당장 1만명 이상을 정규직으로 전환 채용할 수 있다." 막대한 이익을 유동성 자금으로 쌓아두지만 말고, 정규직 전환·청년실업 해소 등 고용 자금으로 투자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난 4월, 노동부는 '파견대상 업무 및 파견근로자 활용 실태 보고서'를 만들었다. 제조업을 포함해 모든 업종의 단순직무 등에도 파견을 허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9월 정기 국회에서 정부·여당이 관련법을 전면 개정하지 않을까 노동계는 긴장하고 있다. 보고서 내용대로 법이 바뀐다면, '불법 파견'이란 말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함부로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법에 호소할 길도 사라질 것이다.

구로·안산·광양·울산=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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